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같은 또래거나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부모님 세대 얘기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았으므로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래에 비해 일찍부터 ‘애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어릴 적에 살았던 우리 집은 초가집으로 지어졌다. 할아버지가 집을 지어 아버지에게 물려주셨는데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으니 벌써 65년이 훨씬 넘었다.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바닥에는 넓은 돌로 구들장을 만들어 방바닥으로 사용하였다.
사면에 황토로 벽을 쌓아 올렸다. 나무 서까래를 연결하고 우엉이나 짚을 엮어 지붕을 만들었다. 창호지로 만든 문을 붙여 초가집을 완성하였다.
우리 집은 크게 안채와 아래채, 화장실, 우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채에는 안방과 사랑방, 재래 부엌과 외양간이 순서대로 붙어 있었다. 시골에서는 소가 농사일을 도와주거나 소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등 중요한 존재이므로 외양간을 부엌에 붙여서 짓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다 보면 소도 그 냄새를 맡고 부엌으로 얼굴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러면, 음식 찌꺼기를 조금 떠서 여물통에 넣어 주면 고맙다면서 한동안은 조용해졌다.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연기를 포함한 뜨거운 기운이 굴뚝으로 나가면서 방바닥에 깔아 놓은 구들장을 데운다. 화학제품인 장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짚으로 엮어 만든 돗자리나 멍석을 장판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장작을 너무 많이 때면 구들장이 너무 뜨겁게 데워져 방바닥에 깔아 놓은 장판이나 이불이 녹아내리기도 하였다.
초가집은 방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겨울에는 이불을 덮고 있어도 입김이 절로 나온다.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잠을 자기 시작할 때는 방바닥이 뜨거우나 새벽쯤에는 구들이 식어 버린다. 아버지가 새벽에 소죽을 끓이시면 다시 방이 따뜻해지고 자식들은 추위에 잠이 깨었다가 다시 잠들게 되므로 늦잠을 자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새벽에 밭에 가서 일을 하시거나 지게로 땔감을 해 오신 후 함께 아침 식사를 하셨다.
우리 집은 호롱불을 사용하였다. 안방에 이동용 하얀색 호롱불이 1개 있었고, 안방과 부엌 사이 벽에 구멍을 내어 호롱불을 설치하였다. 저녁에 부엌에서도 설거지나 잡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으므로 숙제를 할 수 없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호롱불을 중심으로 죽 둘러엎드려서 숙제를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도 형과 누나들 틈에서 연필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공책에 ‘철수야, 영희야’를 쓰기도 하였다.
1970년대 범국가적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골 동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꼬불꼬불하던 좁은 길을 넓혀 신작로라는 넓은 길을 만들어 달구지나 리어카가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동차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천을 정비하여 홍수에 대비하기도 하였고, ‘통일벼’나 ‘일반벼’ 등 새로운 벼 품종도 보급되었다. 농사를 짓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수확량도 늘게 되었다.
한편, 초가지붕이던 것을 기와지붕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하였다. 새로 입힌 기와장이나 슬레이트에는 파란색이나 빨간색으로 페인트도 칠하였다. 온 동네가 수를 놓은 듯 알록달록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도 초가지붕을 걷어 내고 파란색으로 슬레이트를 칠했다. 초가지붕에 기생하던 벌레나 생쥐들이 대폭 줄어들어 위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겨울철이면 둘러앉아 벼룩이나 이를 잡는 횟수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 슬레이트 지붕이 아직도 우리 시골집 지붕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온 동네를 꽃으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초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에 가는 신작로 양쪽에 코스모스나 봉숭아꽃을 심었다. 마을 어귀에는 예쁜 꽃동산도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마을마다 꽃동산 하나씩을 의무적으로 만들도록 하였고 학생들 중에 책임자를 정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매주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빗자루로 마을 길을 쓸었고, 모두 모여 꽃동산에 심어 놓은 식물을 돌보기도 하였다. 반(半) 강제, 반(半) 자발적인 활동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어른들은 전깃불을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밤이 되어도 숙제를 할 수 있었다. 호롱불이나 보아 왔던 시골 사람들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어머니들이 제일 기뻐하셨다. 호롱불에 의지하여 부엌일을 하시다가 편리하게 전깃불을 이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전기가 들어온 것에 대해 부엌 바로 옆 외양간에서 살고 있던 우리 집 소도 아마 우리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초가집에도 전기가 들어오다니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하였다.
동네 곳곳에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잇는 공사를 하고 난 자리에는 구리선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전봇대 밑이나 전기 공사를 한 곳을 다니면서 구리선을 주워 모았다. 모은 구리선은 돈이 되므로 부모님들이 업자들에게 싼값에 팔기도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자식들도 모두 결혼하여 출가하고 부모님도 연세가 많아 더 이상 소를 키울 수 없었고 외양간도 필요하지않았다. 흙으로 만든 벽은 조금씩 무너지려고 하였다. 안채 중 반은 시멘트를 덧발라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안방과 부엌을 합하여 방을 넓히고 구들을 들어낸 후 기름보일러를 설치하였다. 외양간은 없애고 그 자리에 안방과 같이 보일러를 깔고 부엌으로 개조하였다. 마을 공동 수도가 들어와 싱크대도 설치하였다. 초가지붕에 구들장이 제 역할을 다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현재도 우리 집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집이 무너질 때까지 그대로 보존하라고 말씀하셨다. 한식 때나 추석 때마다 형제들이 모여 시골집을 청소하고 며칠 동안 생활한다. 부모님 산소도 돌본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지만 양지바른 집이라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죽어 있는 벌레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면 펜션에 놀러 온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상태가 된다.
시골집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다. 전기, 전화, 텔레비전, 가구 등 모두가 그대로. 심지어 어머니가 볼펜으로 장판에 적어 두었던 아들의 휴대폰 번호도 그대로 남아 있다. 낡은 시골집에서 가족들끼리 술도 한잔하면서 어릴 적 얘기, 부모님 얘기, 자식들 얘기로 꽃을 피운다. 술이 거하게 되어 가끔씩 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맑고 신선한 공기를 원 없이 들이 마실 수 있다. 몇십 년 전에 보았던 달과 별들이 그대로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다. 지나간 어린 시절이 어제 일같이 떠오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이.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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