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9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기사2리 대밭마을’이라는 조그만 산골 동네에서 7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쳐다보면 하늘만 보일 뿐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산골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안동 산골에서 태어나 오로지 농사일만 하시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아들 셋과 딸 넷 자식들을 위해 주야로 고생하시다가 아무런 영화(榮華)도 누리지 못하신 채 이생을 마치셨다. 부모님 모두 가정 형편상 초등학교 정문조차 구경하지 못하셨다.
다행히 부모님은 밥을 지으시거나 소죽을 끓이시면서 부지깽이로 한글을 깨우치시고, 남들 어깨너머로 셈법을 익히시어 어렵사리 가정을 일구셨다. 특히, 어머니는 셈법을 곧장 잘하셔서 재배한 곡식을 판매할 때 장사꾼들이 물량이나 가격을 속일 수가 없었다. 계산기가 없던 시절 정확한 셈법을 하여 장사꾼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속임수를 제압하셨다.
아버지는 1944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징용(徵用)으로 끌려가셨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공세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일본군이 마지막 저항을 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본군의 비행장을 만드는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하셨다. 평상시에는 비행장 건설 일을 하다가 미군이나 소련군의 폭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토굴로 대피하셨다. 폭격이 끝난 후 다시 비행장 건설 일을 하셨다. 사이렌이 늦게 울리는 경우에는 인명 피해가 불가피하였다고 한다.
강제노동하에서도 어렵게 돈 몇 푼을 마련하여 산골에 조그마한 밭뙈기를 마련하셨다. 목숨과 바꾸어 얻은 땅을 파고 일구어 우리 7남매를 키우셨다. 그리고는 당신이 마련하신 그 밭뙈기에 영원히 잠들어 계신다.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밭일을 거들거나 집에서 기르던 소를 몰고 산으로 가 풀을 뜯어 먹였다. 산에서 땔감용 나무를 마련하기도 하고 소 풀을 베어 소죽을 끓이기도 하였다. 우리 동네 친구들도 모두 일상이 나와 똑같았다. 그러니, 내가 느낀 박탈감이나 소외감은 상대적으로 덜했다고나 할까?
예전에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한 코미디언이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이라고 말하여 유행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소를 직접 키웠다. 소를 키우는 일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거들어야 했다. 시골 생활은 너무 힘들었고 공부도 마음껏 할 수가 없었다. 공부만 하는 도시 어린이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였다. ‘커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1985년, 안동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소 키우는 일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안동군(郡)에서 안동시(市)로 나가 자취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시내에서 공부를 하고 토요일에는 시골집으로 가서 농사일을 거들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쌀과 김치를 싸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자연스레 농사일을 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힘든 농사일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으니 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1988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시내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작시를 낭독한 적이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던 선배의 권유도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에서 입학할 당시까지만 해도 10년 후 나의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10년 후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대학교 기숙사 생활이나 자취 생활을 하면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 과외를 하여 학비를 마련하였다. 1995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거창한 포부라기보다는,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나도 동참하고 싶어서였다.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입시학원에서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국어를 가르쳤다. 생계비를 마련하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1주일에 금요일과 토요일 5시간씩 입시학원에서 국어를 강의하였다. 1주일에 기본적으로 10시간 이상은 경쟁자들에게 뒤진 채 기울어진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차 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입시학원도 그만두어야 했다. 법대를 나오지도 않은 내가 법대 졸업생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시험공부를 위한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자금을 융통하여 어렵게 2차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99년, 사법연수원 30기로 서초동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였다. 그간 노력을 보상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님이 제일 기뻐하셨다. 이제야 부모님께 조그만 효도라도 한 듯한 뿌듯함이 일었다. 700명 합격생들은 주야로 부딪히면서 예비 법조인의 실력을 연마하였다. 검사가 되려던 나의 꿈도 점점 열매를 맺어 가고 있었다.
2001년, 드디어 대한민국의 검사가 되었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산골 실개천에 살던 미꾸라지가 뜬금없이 용이 된 것이다. 울산지검을 시작으로, 수원지검, 청주지검, 서울중앙지검 등지에서 형사부, 강력부, 특수부 검사를 두루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하였다. 분에 넘치게도 법무부와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에 두 차례씩 근무하면서 기획, 인사, 예산, 법제 업무에 대해서도 경험을 쌓았다. 법무부 과장과 상주지청장, 부산지검과 수원지검 차장검사, 서울고등검찰청 공판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미미하지만 조직 운영도 경험하고 관리자와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함양할 수 있었다. 정의가 무엇인지, 공정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느꼈다.
이제 내 나이 오십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가족으로 처와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것이다.공자는 만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고 한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공자 같은 성인(聖人)이야 오십이 되어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소인(小人)이야 하늘의 뜻을 알고자 노력할 뿐이다. 20대 후반, 사법고시라는 무모한 도전을 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이제 나를 돌아볼 시간이 되었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