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은 그야말로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다. 시골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과 달리 아등바등 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골 어린이들은 도시에 살고 있던 또래에 비하여 문명의 편리함을 늦게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질문명이든 현대적인 각종 서비스든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들 한다.
나는 1969년에 태어났지만 1년이 늦은 1970년으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다.
시골에서는 갓난아기가 무사히 살아가는지 경과를 본 후 출생신고를 하였다. 농사일이 바쁘다 보니 출생 시마다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동장이 면사무소에 갈 때 함께 부탁하였다.
이름도 돌림자 한 글자는 정해져 있으니 나머지 한 글자를 알려 주면 면사무소 서기가 알아서 한자를 정해 주었다. 내 이름도 ‘찬(贊)’ 자는 돌림자이고 ‘록(祿)’ 자의 한자는 면사무소 서기가 선택한 것이다.
나는 돌 사진이 없다. 내가 돌이 되었을 때 사진을 찍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는 사진사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나타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아침에 농사일을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니 사진사들과 마주칠 리가 없다. 그러다가 보니 자식이 돌이 되어도 제때 사진을 찍어 줄 수 없었다. 내가 2살쯤 찍은 사진이 첫 번째 사진이다. 초가지붕을 배경으로 작은형과 누나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한동안 이 사진을 두고 작은형과 경쟁을 하였는데, 현재는 내 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성인이 되어서도 독사진 찍기에 집착하는 성향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상수도가 없었기에 우물에 있는 물을 길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평상시에는 집 바로 앞에 있는 우물을 이용하였고, 날이 가물어 수량이 부족하면 마을 공동 우물을 이용하였다. 어머니는 똬리를 머리에 얹어 그 위에 물통을 이고 물을 나르셨고, 우리는 ‘무지개(물지개)’ 양쪽에 물통을 달아 물을 져 날랐다. 겨울이 되어 우물물이 꽁꽁 얼면 곡괭이로 구멍을 내어 우물물을 길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가 우리 집에서 사용하던 우물물을 정비하여 펌프라는 것을 설치하였다. 한 바가지 정도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신기하게도 물이 딸려 올라오게 된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물의 양이 부족하여 금방 흙탕물이 올라왔고, 장마가 치는 시기에도 흙탕물이 섞여서 올라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펌프를 통해 물이 올라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펌프질이 재미있기도 하여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롱불과 남포등을 이용하였다. 기름을 아끼기 위하여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두워지면 간단히 숙제를 하고 빨리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밤이 길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슬로우 라이프는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밤에도 숙제를 할 수 있었고 어머니는 편하게 설거지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다. 전깃불을 켜 두고 밤늦게까지 농산물을 다듬는 등 추가적인 일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것이다.
전기가 공급되니 텔레비전도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웃 동네에 텔레비전 구경을 가기도 하였다. 동네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텔레비전의 신기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집이기 때문에 눈치가 보여 오랫동안 볼 수는 없었다. 적당히 보고는 자리를 떠서 다른 집으로 가거나 우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동네에 전화가 들어왔다. 동장 집에서 먼저 전화를 넣었다. 대학을 다니던 큰형님이 가끔 동장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그러면 저 멀리서 동장이 고함을 쳐서 어머니를 불렀다. 전화가 왔으니 빨리 와서 받으라는 것이다. 어머니는집안일을 하시다가도 그 소리를 들으시고 부리나케 달려가시곤 하셨다. 동장은 어떤 때는 “아무개네 집에 전화가 왔습니다.”라고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에도 전화를 넣었다. 웬만한 집은 거의 전화를 넣었다. 초기 전화기는 오늘날과 같이 다이얼을 돌리거나 번호를 눌러서 통화하는 구조가 아닌 ‘자석식 전화기’였다. 전화기 수화기를 들고 오른쪽에 달린 손잡이를 마구 돌리면 우체국 교환이 나온다. 원하는 전화번호를 연결해 달라고 요청하고 전화를 끊으면 한참 후에 전화가 와서 연결되었으니 통화를 하라고 안내하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전화를 하였다. 안동 시내에는 전화를 교환해 주는 전화국이 있었다. 자취 생활 중 시골 부모님에게 연락드릴 일이 있으면 전화국에 가서 전화번호를주고 통화를 신청하였다. 대기실에 한참 동안 앉아 있으면 이름을 호출하고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었다. 전화국 직원이 시골 우체국 직원에게 연락하고 우체국 직원은 시골집으로 연락하여 통화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전화기는 다이얼 전화기로 바뀌었고, 동그란 숫자판에 손가락을 넣고 다이얼을 돌려 원하는 전화번호와 바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엄청난 발전이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까지도 최신 기술의 휴대폰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세상이니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다.
시골에 물질문명이 전파되면서 시골은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노동력을 줄이고 생활에서도 수고를 덜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비례하여 시골만의 독특한 슬로우 라이프는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고, 그들의 넉넉한 인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는 시골의 옛 정서를 간직한 사람들도 점점 줄어가고 있다. 앞으로 몇십 년이 지나면 나의 어릴 적 시절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각박한 도시생활 속에서 가끔은 시골에서의 슬로우 라이프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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