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도 ‘알바(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  우리가 대학교를 다닐 때도 학생들 ‘과외’ 아르바이트가 성행하였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과외를 하였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자신 있는 일이고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과외를 시작하였다.

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을 담당한 적도 있었다.

과외는 학생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였다. 학생이 차분하게 잘 따라오면 가르치는 사람도 덩달아 신이 나는 법이다. 2학년 여름방학 때는 2개월 정도 입주 과외를 하기도 하였다. 여름방학 기간 동안 중학생의 집에 들어가 삼시 세끼를 얻어먹으면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주요 과목에 대해 1학기 때 배운 것을 복습해 주고 2학기 때 배울 것을 예습해 주었다. 가르치는 시간이 많다 보니 ‘페이(pay)’가 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과 고등학교 2학년 여동생을 함께 과외 한 적이 있었다. 영어 한 과목만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은 큰 부담이 없었으나 고등학교 3학년이 문제였다. 월등히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바닥권을 맴도는 친구도 아니었다. 수능시험 때까지 영어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과외의 결과를 정확하게 검증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신중하고도 꼼꼼히 3학년을 지도하였다.

당시 수학능력시험을 두 번 치르던 때였다. 불행하게도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 첫 번째 시험보다 두 번째 시험에서 성적이 더 떨어지게 되었다. 학부모의 성화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두 번째 시험이 훨씬 어려웠다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는 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시험이 더 어려웠으므로 성적이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나의 설명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학부모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학생의 어머니는 두 학생의 한 달 치 과외비를 주지 못하겠다고 나에게 통보하였다. 충격적이었다. 자기의 자식을 위해, 그 자식이 시험을 잘 보도록 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르쳤음에도 이런 대우를 받으니 억울하였다. 돈이 많은 집안 같은데 가진 분들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정당하게 일한 대가를 받아 내야만 했다. 나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다.

학생 2명에 대한 과외비였으니 자취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다. 학생의 어머니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학생의 아버지와 남자 대 남자로 대화해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과외를 시작할 때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명함이 있어 무작정 직장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당시 학생의 아버지는 남대문에서 대규모 안경 도·소매업을 하고 있었는데 매장도 넓고 손님들도 아주 많았다. 한눈에 봐도 영업이 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잘사는 분들이 나에게 줄 코 묻은 푼돈을 떼먹으려고 한단 말인가?

처음에는 학생의 아버지에게 좋은 말투로 밀린 과외비를 받았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학생의 어머니와 상의가 되었던지 부정적인 대답만 하였다. 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제 나도 인정사정 볼 것이 없었다. 싸움 장소는 내 영업장이 아니다. 주인이 손님과 돈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주인에게 아주 악영향을 미치고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

우리 주변에 몇몇 손님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학생의 아버지는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직장에서 이러지 말고 이번 주말에 집으로 오면 밀린 과외비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은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

드디어 주말이 되어 과외를 하던 집으로 돈을 받으러 가야 했다. 대학교 2학년이던 내가 과연 적지(賊地)에 가서 학생 부모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을지,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과외비를 무사히 받아 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인지 나 자신이 초라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을.

잔소리나 야단을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가 도살장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학생의 어머니가 보였고, 학생의 아버지도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숨을 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학생의 어머니는 왜 남편의 직장에 가서 난리를 쳤느냐고 추궁하였다. 나도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죄송하다고만 하였다. 어차피 돈만 받아 나오면 될 일이기 때문에 싸우면 내가 불리하였다. 돈을 안 준다면 다시 발톱을 꺼내어 싸워야 하지만 돈을 받기 전에는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야 했다.

학생의 아버지도 몇 마디를 거들었다. 그러나, 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이 떨어진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단지 자신의 처를 도와주었을 뿐이리라.드디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두툼한 돈 봉투가 내 손으로 전달되는 순간 괜스레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내가 좀 더 노력하였으면 성적이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생각도 떠올랐다. 집을 나오면서도 학생들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다. 아름답게 이별할 기회가 사라졌다. 내 책임인 듯 괜히 학생들에게 미안하였다.

과외를 하면서 좋은 관계가 형성되는 일도 있었다.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나를 잘 따랐고 학생의 부모님도 나를 잘 대해 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함께 농구장에 가서 농구를 하기도 하였고 당구를 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학생의 어머니가 집에서 삼계탕을 끓여 함께 먹기도 하였다. 잊을 수 없는 삼계탕 맛이다. 그때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가끔씩 학생을 만나고 있다. 이제 그 학생은 어엿한 가장이 되어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사법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조금씩 보내 주는 돈으로는 생활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였다.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도 사야 하였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1996년, 규모가 있는 입시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강사 일을 하였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6시부터 11시까지 풀로 강의하는 방식이었다. 외고와 과학고를 준비하는 중학교 3학년 1개 반, 일반 중학교 3학년 1개 반, 고등학교 1학년 1개 반이 나의 담당이었다. 원장님과 사모님은 매우 따뜻하고 인자한 분들이었다. 내가 강의하는 방식이나 학생들 관리 방식, 문제 출제 방식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주셨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 1차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경쟁자들에 비해 1주일에 최소한 10시간 이상은 손해였다. 경쟁자들은 집에서 따뜻한 쌀밥을 먹고 공부할 때 나는 김밥으로 때우고 학생들의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학원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손해였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니 감내(堪耐)해야만 하였다.

학생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였으므로 학원 수업을 대충 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학생들이나 그 부모님들로부터 못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욕을 먹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내신 대비 모의고사도 치러야 했다. 시중에 출판된 문제집을 검토하고 학교 기출문제를 분석하여 문제를 출제하기도 하였다. 문제집에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학생들을 테스트하기도 하였다. 나의 경쟁자들은 날밤을 새워 공부하고 있을 터인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1997년 드디어 사법고시 1차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공부하는 데 투자하였다. 낭만도 즐길 수 없었다. 이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다. 미팅 한번 하지 못하였다. 마무리 시험 준비를 위해서 1년 가까이 강의하던 학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간 받은 월급을 조금 모아 둔 것도 있었다. 이제는 사법고시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렵사리 원장님께 말씀드리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학생들과 이별을 하려니 서운한 감정도 복받쳐 올랐다.

1998년 6월 29일 사법고시 2차 시험이 끝났다. 2차 시험 동안은 과외나 학원 강사를 하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려 있었다. 그해 7월부터 동네에 있는 입시학원에서 다시 학생들을 상대로 국어를 가르쳤다. 사법시험 2차 합격 소식도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2008년, 내가 법무부 검사로 근무하던 때에 검찰 내부망을 통해 한 통의 쪽지가 날아왔다. 초임검사가 나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다. “혹시 96년경 ○○에 있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신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중학생일 때 배운 선생님 같으셔서요.”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렵게 공부를 하던 시기, 그 검사는 과학고와 외고반 수강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어엿한 검사가 되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쳐 올랐다. 머지않아 그 검사 부부와 함께 저녁을 하면서 오랜만에 옛날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대학교 시절 동안은 아르바이트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은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 수입으로 학교에 다니고 시험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였다면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천직(天職)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으나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녹(祿)을 먹게 된 것이 아닌지 내심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어려운 시기에 학생들의 도움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 정확하게는 학생들의 부모님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것이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혹시라도 내가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학생들에게 나의 모든 능력을 쏟아붓지 못한 것이 아닐까 내심 미안하였던 적도 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모든 학생들이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소중한 사람들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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