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종래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사회의 부조리(不條理)를 혁파하려는 움직임, 사회를 변혁하려는 움직임, 소위 혁명을 기도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시민 개개인들의 힘을 모아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에서도 학생운동이 일상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은 크게 3개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민족해방 계열인 ‘NL(National Liberation)’, 민중민주 계열인 ‘PD(People's Democracy)’, 제헌의회 계열인 ‘CA(ConstituentAssembly)’이다.
우리나라 사회 모순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느냐, 어떻게 사회를 변혁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NL은 우리나라를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면서 미국으로부터의 자주, 통일, 민족해방을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를 미국의 식민지로 인식하였다. 1987년부터 NL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부류가 헤게모니(hegemonie)를 장악하였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수령론 등을 공부하였다. 주체사상이나 수령론 등은 어려운 말이 거의 없고 알기 쉬운 말로 쓰여 있었으므로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 상당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서적이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있었다.
NL은 조직력과 실행력, 대중선동 능력이 탁월하였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 정과 의리로 뭉쳐져 있었고 강력한 메시지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도 하였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이 대부분 NL에서 배출되었고, 1987년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993년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즉 ‘한총련’으로 재발족하였음)’ 의장도 NL에서 배출되었다. 학생운동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PD는 우리나라를 신(新)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면서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이 결합하여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등 사회주의 서적을 원전(元典)으로 삼고 노동자 계급 중심의 혁명을 추구하였다. 소련식 사회주의를 통해 이상적인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PD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에 바로 나서기보다는 원전에 기재되어 있는 행간(行間)의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NL의 이론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PD의 이론은 심오하게 공부를 하여야 이해할 수 있었다. PD는 NL에 비하여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고 엘리트주의나 우월주의 의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PD는 지식의 함양으로 자기만족이 될 수는 있었으나 대중을 장악하고 학생운동의 구심점으로 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CA는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 사회로 규정하였다. 현재의 기득권 계급을 배제한 상태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과 그를 통한 민주주의 민중 공화국을 구현하는 헌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였다. 혁명적 민중은 무장봉기로써 현 정권을 타도하고 제국주의를 축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CA는 NL이나 PD보다는 학생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대체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람들이 현재도 우리나라 정치나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1988년에 입학한 ‘88꿈나무’ 학번이었다.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고 우리가 1988년에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선배들은 ‘88꿈나무’라고 불렀다. 그러나, 캠퍼스에서 낭만을 꿈꾸던 우리의 희망은 입학 첫날부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선배들이 교내 곳곳에서 스크럼을짜고 행진을 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운동가를 불렀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1987년도에 절정을 이루었던 학생운동이 여전히 캠퍼스를 장악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대학교 캠퍼스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로 달아 있을 때였다.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학과 공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 후반 대학교에 다닌 우리들에게는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특별한 학생들만 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학생운동은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는 보편적인 사회운동으로 인식되었다. 사회운동이나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교내외 서클에 가입하지 않는 학생이 오히려 드물 정도였다. 대부분이 교내 서클 두어 군데에 가입하여 사회 변혁에 대한 학습을 하였다.
가끔씩,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교문을 통해 신림동 쪽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로 나아가게 된다. 학생들은 굳이 불법이라기보다 정당방위(正當防衛) 내지는 자구행위(自救行爲)로 해석하였다. 교문에 진을 치던 전투경찰은 학생들의 진군을 막았다. 드디어 ‘교투(校鬪)’가 벌어졌다. 말 그대로 학교에서의 전투였다. 학생들은 정문에서 캠퍼스로 올라오는 양쪽 보도에 설치된 블록을 뜯고 깨서 ‘짱돌’을 만들었다.
일부학생들은 화염병도 준비하였다. 당시까지는 화염병 제조나 사용 자체로 처벌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제일 앞 선봉대에서는 양쪽에서 모두 쇠파이프로 진짜로 ‘전투’를 하였다. 경찰은 안면보호대를 착용하고 방패를 들었으니 학생들이 불리한 싸움이었다. 돌에 맞거나 쇠파이프에 맞아 학생들과 경찰들이 서로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치열한 전투였다.
학생들은 서울 시내 거리에서 하는 집회인 ‘가투(街鬪)’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유인물을 몰래 가지고 가 시민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시민들도 학생들이 배포하는 유인물을 잘 받아 주었다. 때로는 명동성당에서 철야 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시내 집회는 금지되었던 것으로 생각이된다. 거의 모든 집회에서 ‘짱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였다.
거리 투쟁이라 불리는 ‘가투’에서는 경찰 특수기동대인 ‘백골단’이 단연 갑(甲)이었다. 백골단에게 체포될 경우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백골단은 악명이 높았다. 집회의 최전선에 백골단이 나타나면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시위대들이 백골단과 싸움을 하여 승리하였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할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에 불법집회 참가자로 체포된 사람만 1,000명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닭장차’라고 불리는 경찰차 안에서 백골단들은 체포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경찰은 학생들을 유치장에 분산 수용한 후 전과와 수배 조회를 하고 집회에 참가한 동기와 불법행위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시국사건 수배자, 집회의 주동자나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다음 날 새벽에 훈방조치 되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은 1990년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이 제고(提高)되면서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 상태인가에 대한 회의가 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GNP)이 북한을 월등하게 앞지르면서 주체사상 이론이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NL 계열의 기본 논리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PD 계열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과 서독이 통일에 이르게 되었고, 1991년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다고 평가되던 소련이 해체되었다.
동구권 사회주의도 붕괴하여 더 이상 원전(元典)에 따른 사회주의 혁명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 검사 임용을 신청하였을 때, 집시법 위반 등 시위 전력이 있던 사법연수생들은 3차 시험인 면접에서 ‘심층면접’을 받아야 하였다. 면접관들은 시위 전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지원자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우리가 구속되어 형을 선고받는 고초를 당하고 사회에서 불이익까지 받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재정권과 싸워 현재의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3차 심층면접에서 탈락한 동기생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586세대’에 속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1988년 참신한 대입 새내기로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은 지 30년이 훨씬 지났다. 대학교 캠퍼스는 여전히 젊음의 열기로 분주하기만 하다. 예전처럼 밤새 술을 마시면서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토론하고 울분을 토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식으로 우리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나는 1980년대 끝자락 ‘보통 대학생’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 더 앞서가지도 않았고 시대 상황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 학생운동이 옳았는지 잘못되었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 시대 학생들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가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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