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2개 반으로 된 남녀공학이었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초등학교에 가는 길은 양옆으로 논과 밭이 즐비하였다. 산길을 따라 조그만 고개를 넘어가면 넓은 신작로를 만나게 된다.

이웃 동네에 사는 친구들도 만나게 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이지만 당시 새롭게 마련된 신작로이므로 엄청 넓게 느껴졌다.

장마철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흙탕물로 도로가 유실되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콸콸 흐르는 흙탕물이 무섭기도 하였다. 도로가 끊어졌을 때는 위험하여 학교에 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

우리 초등학교에는 대부분 농사를 짓는 가정의 자녀들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저렴한 ‘다이얼 표’ 검은색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가장 부유한 계층의 자녀로 알려진 선생님, 면사무소 직원, 농협 직원 등의 자녀들은 하얀 고무신을 신기도 하였고, 때로는 운동화를 신은 학생들도 가뭄에 콩 나듯이 구경할 수 있었다.

검은 고무신이 더 오래 신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발만 봐도 누가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부유층’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고학년이 되어서야 ‘육성화’라는 검은색 운동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는 건빵을 나누어 주었다. 건빵을 배급받아 집으로 가지고 와 가족들이 나누어 먹었다. 형이나 누나 때는 빵도 배급해 주었다고 한다. 놋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놓고 건빵을 몇 개 넣어 잔뜩 불렸다. 배가 빵빵한 건빵 몇 개만 먹으니 우리들 배도 빵빵해졌다.

추운 겨울에는 교실마다 난로를 피워야 했으나 갈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늦은 가을 선생님의 인솔하에 우리들은 낫이나 톱을 들고 산에 땔감을 구하러 다녔다. 며칠에 걸쳐 우리들이 모아 온 땔감은 학교 뒤 창고에 저장을 하고 난로를 지필 때마다 불쏘시개로 사용하거나 부족한 갈탄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교실 가운데에 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가져온 도시락을 난로 위에 올려 밥을 데웠다. 난로 바로 뒤에 앉은 친구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도시락 순서를 바꾸면서 골고루 데우는 일을 담당하였다. 여러 개의 도시락 중에 어느 도시락이라도 밥이 타게 되면 그 친구는 혼이 났다.

그 친구는 도시락을 데우는 일에 열중하여 공부는 뒷전이었다. 선생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고, 그 친구도 천명(天命)인 양 매일같이 도시락을 데웠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시골 학생들은 집에서도 가정의 보탬이 되어야 했다. 농사일을 하는 것 이외에도 푼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였다. 봄이 되면 약초가 되는 ‘인동초’를 따서 말려 팔기도 하였다. 인동초에는 꿀이 있어서 입으로 깨물어 꿀을 맛보기도 하였다.

여름이 되면 또래들끼리 만나 산에 도라지를 캐러 다녔다. 괭이 하나와 망태기 하나를 가지고 먼 산까지 다녔다. 가까운 산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모두 캐 버린 상태이므로 점점 멀리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하얀색이나 보라색의 도라지 꽃을 보면 냅다 달려갔다. 도라지를 캐어 깨끗이 씻고 말려서 약재로 팔았다. 내친김에 산삼을 캐러 다니기도 하였으나 구경조차 못 하였다.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이 되면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전통이었다. 우리도 6학년이 되어서 수학여행을 가야 했으나 다들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담임선생님은 들판이나 산에 있는 ‘인동초’를 따서 말려 팔아 수학여행을 가는 비용을 마련하자고 제안하셨다.

선생님은 젊으셨고 성실하시고 아이디어도 많으신 분이셨다. 우리도 모두 찬성하였다. 집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인동초를 따러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는 선생님과 함께 산으로 들로 인동초를 따러 다녔다. 인동초는 넝쿨로 이루어져 있어 혹시라도 뱀에 물리면 큰일이 날 수 있어서 매우 조심하였다. 다행히 아무도 뱀에 물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가 따서 모은 인동초를 학교 옥상에서 잘 말리셨다. 인동초는 어느덧 수북이 쌓이게 되었고 그것을 팔아 꽤 많은 돈이 모였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개인 통장을 만들어 인동초를 팔아 모은 돈을 배분해 주셨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6학년이던 1981년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졸업 후 30년이 되는 해에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각자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여 가정과 사회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졸업 3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1년 5월 15일 스승의 날! 우리 졸업생들 60여 명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과 가족들을 모시고 30년 전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30년 전 인동초를 팔아 수학여행을 갔던 얘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우리들과 선생님은 모두감격하였고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을 잘이끌어 주신 담임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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