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의무이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존재할 수 없고, 우리 가정과 개개인도 존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고,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인 1990년 1월 30일 군에 입대하였다.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형이 제대하여 다시 대학교를 다녀야 하였다.
학생들 과외를 하여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마련하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생활비를 아끼더라도, 시골에서 자식 2명을 한꺼번에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1990년 당시, 학생운동이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은 대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1학년과 2학년 때 선배들로부터 이론과 실천을 배워 어느 정도 틀이 갖춰진 3학년이 덜컥 군에 입대한다는 것은 전력 손실에 따른 아쉬움은 물론 ‘변절’로까지 비판받는 분위기였다.
우리나라 군대를 ‘양키의 용병’으로 인식하는 쪽에서는 입대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집에서 뛰쳐나와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에 전념하면서 당국의 추적을 피하였고, 어떤 친구들은 집 주소를 옮겨가며 징병검사를 회피하여 스스로 수배자가 되기도 하였다.
나도 입대에 대해 선배들과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밤새워 함께 술 마시고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혼자서만 훌훌 털어 버리고 군대를 가자니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편한 군대를 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지 않고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다는 것에 상당한 위로를 얻었다.
입대 전날, 함께 입대하는 고향 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이동하였다. 아직은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차창 가에서는 따스한 햇볕을 느낄 수 있었다. 복잡한 대학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는 여정에 스쳐 가는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춘천(春川)은 호반의 도시다. ‘봄이 오는 시내’란 예쁜 이름의 춘천은 단순한 지도상의 지역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청춘의 이정표 같은 상징성을 가진다. 대학교시절 춘천이나 대성리 방면으로 엠티(MT)를 가 보지 않은 학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군대에 끌려가기 위해서’ 그 아름다운 춘천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였다. 신병이 입대하는 지역은 몇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 춘천에 있던 ‘102보충대’로 입대하면 강원도 전방에 배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신병들이 102보충대를 가장 꺼리던 것이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춘천 시내는 그때 처음으로 가 보았다. 도시가 아담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날씨도 추웠고 102보충대로 입대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친구와 함께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밀었다. 중학교 때 머리를 민 이후 처음으로 빡빡 밀었다. 두상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고 말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소주를 걸쳤다. 102보충대에서 가까운 여관을 잡아 둘이서 그간 살아온 인생 얘기에 밤 깊은 줄을 몰랐다. 그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하면서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인생에서 잊지 못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친구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눈이 그때부터 10일간 계속되리라는 것을.
마침내, 우리는 102보충대에 입대하였다. 두 부류의 사람, ‘민간인’과 ‘군인’의 갈림길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배웅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내심 부럽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홀로 입대하는 것이 깔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무반을 배정받은 후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는 정말로 ‘군인’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입고 있던 옷을 고향으로 배송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박스에 담아 제출하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통상 보충대에서는 3일 정도 생활하면서 소위 ‘사제(私製)물’을 빼고 군인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가 입대한 지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았다. 1주일 동안 하루도 하늘을 볼 수 없이 매일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눈을 치우는 도구가 부족하여 매일 밥을 먹고 군홧발로 눈을 치우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군 생활이 예고되었다.
끊임없이 내리던 눈은 10일이 지나 그쳤고, 우리 교육생들은 각자가 배정받은 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대부분이 강원도의 각 부대로 배정받았고, 나는 속초에 있는 사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속초 부대에서 8주간의 신병 교육을 받았다. 2월 초의 날씨이지만 바닷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였다. 계속되는 폭설에 눈을 치는 것이 하루하루 주요한 일과였다.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하더니만 정말이었다. 나는 속초에서도 행정병으로 차출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하였다. 훈련이 끝나고 삼척에 있는 부대로 이동하였다.
삼척 부대로 이동하였으나 신병 교육은 계속되었다. 이미 8주간의 정규교육을 받았음에도 부대 자체로 2주간의 추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훈련장 언덕이 반들반들하였다. 빨간 모자의 조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교육생들이 새싹을 모두 뜯어 먹어서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말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속초 부대에서는 대규모의 단체생활이었으므로 최소한 꼴찌만 하지 않으면 살아남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삼척 부대에서는 소수의 교육생이었으므로 누구 하나 부족하게 되면 바로 표시가 나고 단체 기합으로 이어졌다. 혹독한 책임이 뒤따랐다.
4월이 되었음에도 아침저녁으로는 매우 추웠다. 취침 전 내무반 청소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교육생 전체가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 바닥을 뒹굴었던 적도 있었다. 정말로 청소가 불량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명령에 복종할 뿐이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구령에 따라 쩌렁쩌렁 복창하면서 연병장을 굴러다녔다. 연병장 웅덩이에는 살얼음이 있었다. 온몸에 모래가 묻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달밤에 장정들 수십 명이 하는 행동을 보자면 웃음이 나오는 일일 수도 있으나 교육생들은 목을 잡고 있는 빨간 모자 아저씨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빨간 모자 아저씨는 교육생들의 목욕을 금지시키고 얼차려를 받은 상태 그대로 전투복을 입고 침낭 속에서 자도록 명령하였다. 침낭 속이 따뜻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내무반은 모래로 범벅이 되었고 며칠 동안이나 청소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렇게 2주간의 고된 훈련이 끝나고 삼척 부대에서 그 예하 대대가 있던 임원 부대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임원이라는 곳은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나는 대대에서도 행정병으로 차출되지 못하고 다시 중대로, 중대에서 다시 소대 소총수로 더블백을 메고 이동하였다. 춘천 102보충대에서 시작된 고되고 기나긴 신병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게 된 것이다. 폼 나는 군 생활이 아니라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고지에 깃발을 꽂으러 가는 ‘일빵빵(보직 번호가 100임)’이라고 불리는 ‘보병’의 보직을 받게 된 것이다.
임원 부대는 내가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우리 중대는 해안 경계 기간이었다. 나는 훈련소 동기 여러 명과 함께 그 주변에서 가장 높은 바닷가 산 정상에 있던 OP(‘Observation Post’의 준말로 높은 고지에서 전후방을 관측하는 장소라는 의미임)’로 더블백을 메고 땀을 흘리며 올라갔다.
고민스럽고 혼란스럽던 대학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마침내 삼척 부대 1대대 4중대 3소대의 소총수가 되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일빵빵’의 군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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