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장래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린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이나 과학자라는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어린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미래를 꿈꾼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나도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생각하였다.

선생님, 교수, 정치인, 법조인, 과학자 모두 좋았다. 다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아 왔고 나 스스로도 직접 농사일을 거들다가 보니 농사일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적성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영역을 검사하였는데, 가장 맞는 적성으로 건축과 토목 분야가 나왔다. 문과(文科)를 가는 것을 당연시하였는데 적성검사가 반대로 나온 것이다. 당황하였다. 내가 이과(理科) 체질인가? 그러면 2학년 때 이과를 지망하여야 하나? 적성검사가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음에도 결국 2학년 때 문과를 지망하였다. 이과를 지망하여 공부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과학 과목보다는 국어나 사회 과목이 더 좋았던 점도 있었다. 그렇게 문과에서 2학년과 3학년을 공부하였다.

드디어 학력고사를 앞두고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지망하게 되었다. 내가 국어국문학에 적성이 맞는지 알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시를 써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낭송한 경험이 있었고, 국어 성적이 남들보다는 훨씬 좋았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적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다.

몇 가지의 경험과 이미 국어국문학과를 다니고 있던 선배의 권유를 바탕으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자. 그렇게 나의 꿈이 정해졌다.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입학하여 보니 학과 공부에만 전념하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1980년대 끝자락 학번으로 민주화 운동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에 옮기는 일에 동참할 수밖에없었다. 학과 내 모임이나 서클 활동을 하면서 1주일에 몇 개의 세미나에 참석하여야 했다. 사회과학 서적, 사회 비판 서적, 철학 서적, 문학 서적을 공부하였다. 때로는 관련된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기 전에 군에 입대하였다. 나의 꿈을 실현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암흑기에 가까웠다. 다만, 혼란스럽고 복잡하던 기존 생활에서 떨어져 머릿속을 비우고 제로 상태에서 내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군부대에는 내무반에책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책꽂이가 없었으니 책이 있을 리도 만무하였다. 책이 있더라도 내무반에서 책을 볼 여유도 없거니와 졸병이 책을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시기였다. 유일하게 인쇄된 활자를 볼 수 있는 것은 1주일에 한 번씩 배달되는 『국방360 361일보』라는 신문이었다. 그마저도 고참들이 뒤적뒤적하는 것이지 어디 감히 졸병이 건방지게 신문이라니!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정확히 28.5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니 머릿속이 정말로 하얗게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에 배웠던 영어나 수학, 대학교에서 읽고 논쟁하였던 사회과학 서적들의 내용, 모든 것들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백지상태가 되어 버렸다.

1993년 3월, 3학년으로 복학하였다. 우리 같은 복학생들이 현역들의 활동에 끼어들 틈도 없었다. 노골적인 소외감도 느꼈다. 개인의 영달과 사생활도 포기한 채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대학교 1학년과 2학년의 시절을 되새겨 보기도 하였다.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나온 28.5개월의 군 생활이 너무 아쉽기도 하였다. 이제 공부를 시작하여 친구들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했다. 그래, 깔끔히 포기하자.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나도 도서관 화장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영어를 공부하였으나 기본 지식도 부족할뿐더러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땅개’ 소총수로 군대에 갈 것이 아니라 욕을 먹더라도 ‘카투사’를 다녀왔으면 영어 때문에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불현듯 들었다.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킨다고 카투사를 지망하지 않고 강원도에서 현역으로 입대하여 생고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내심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도서관에서 안정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법서(法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전체 학생들 중 대부분이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혹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 같은 뜨내기는 친구들의 말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그들은 스터디 팀을 구성하여 공부를 하는 형태였으므로 그 모임에 끼어 있는 내가 불청객이었다.

마침내 고시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 학과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후배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에게 행정고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도서관에서 행정고시를 공부하는 학생의 비율도 상당하였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몇 년 열심히 공부하여 고시에 패스해야 한다. 합격한 후 염상섭의 『삼대』에 버금가는 부모님 세대, 우리 세대, 우리 다음 세대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글로 한번 써 보자’ 그렇게 뜻하지 않게 고시생의 길에 입문하게 되었다.

나는 행정고시에 대한 매력에 빠져 버렸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 연장선에서 나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행정고시를 패스하여 정부부처에서 우리 사회를 밝고 바르게 만드는 밀알이 되자. 그렇게 4학년 2학기부터 행정고시를 공부하게 되었다. 교양 과목으로 법과대학에서 진행하는 헌법 과목도 정식으로 수강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학문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법 과목 중 먼저 헌법과 민법총칙을 공부하였다. 민법총칙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그 내용에 매료되었다. 단순하게 적시된 법률 조문으로 생각하였는데 행간에 뜻이 숨어 있었고, 조문의 해석도 분분하였다. 예전에 저학년 때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을 해석하던 때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4학년 겨울 방학이 되었다. 이제 모든 학점을 이수하였고 다음 해 2월에는 졸업식이 있을 것이다. 행정고시를 그대로 계속할 것인가? 함께 공부를 하였던 선배는 사법고시로 갈아탔다. 나에게도 사법고시로 갈아탈 것을 권유하였다. 도서관을 돌아보니 대부분이 사법고시를 공부하고 있었다. 행정고시를 하더라도 잘못하면 3~4년을 넘어가기 일쑤였으니 기간을 보더라도 사법고시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사회적으로 사법고시 출신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거창하게 사회 개혁이 아니라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려 한다면 사법고시를 패스하여 검사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검사가 되자!’

오랜만에 시골을 들렀다. 부모님은 왜 빨리 취직을 하지 않고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성화셨다. 특히, 아버지는 부정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다. 하기야 부모님이 연세가 많이 드셨으니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사법고시를 뒷바라지해 주실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 스스로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니 베갯잇이 눈물로 흥건하였다.

아버지는 언제 일어나셨는지 새벽에 밭에 일하러 나가셨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계셨다.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무거운 마음으로 상경(上京)하였다.

이제 나의 목표는 사법고시 합격으로 정해졌다. 적성은 처한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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