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보면, 부모님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식에게 “할 일 없으면 촌에 가서 농사나 지어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아마도 농사일이 특별한 기술이나 큰 자본을 요하지 않고 쉽게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이 시골에 가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생계를 이어 갈 만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농사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다른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농사일이라고 하여 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산골인 우리 동네를 돌이켜 보면 농사일이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우리 동네는 집집마다 최소한 5남매 이상을 두고 있었으니 농지를 많이 개간하여 농사를 많이 지어야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었다. 임야에 있는 나무를 베고 돌을 골라내어 밭으로 만들었다.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 논이 거의 없고 산비탈에 있는 밭이 대부분이었다. 봄이 되면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고 거름이나 비료를 뿌렸다. 비가 오면 보리, 밀, 고추, 땅콩, 참깨 등을 파종하였다. 어릴 때는 목화를 심기도 하였고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기르기도 하였다. 방에서 누에가 뽕잎을 사각사각 갉아 먹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듯하다.

파종 시기가 되면 우리 같은 꼬맹이들도 한몫을 하였다. 주말, 온 가족이 점심 먹을 밥까지 준비하여 밭으로 출동하여 씨앗을 심었다. 오전 내내 쭈그리고 앉아 씨앗을 심고 다 함께 밭 어귀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어른들은 막걸리를 한 잔씩 하면서 꼬맹이들에게 조금씩 주시기도 하였다. 땀을 흘리고 고된 노동 후에 먹는 막걸리 맛은 꿀맛이었다. 농경문화와 음주 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여름이 되면 본격적으로 농사일이 시작된다. 농작물이 커 가는 동시에 잡초도 자라게 되므로 잡초를 뽑고 밭고랑을 매어 공기가 잘 스며들도록 해 주어야 한다. 고추나 참깨가 바람에 스러지면 막대기를 박고 끈으로 묶어 주어야 한다. 열매들이 바닥에닿으면 금방 썩어 버리거나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하루 종일 밭고랑에 앉아 밭을 매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난다. 일어나기도 힘이 든다. 그러니 어르신들이 모두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다니시는 원인이 된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농작물을 수확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더욱 바빠진다. 보리와 밀을 탈곡해야 한다. 밭에 누렇게 익은 보리와 밀을 베어 지게를 이용하여 탈곡할 수 있는 적당한 곳으로 이동시킨다. 탈곡기를 가지고 있는 집에 미리 예약하였다가 하루 날을 잡아 탈곡을 한다. 자식들도 보릿단 묶음을 가져다주거나 보리가마니를 추스르는 것을 도와주는 등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탈곡이 끝나면 까칠까칠한 부스러기들이 온몸에 묻게 되어 가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해가 떨어진 저녁, 마당에 설치된 펌프를 이용하여 우물물을 끌어 올려 등물을 하면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었다. 낮에 탈곡한 곡식들이 처마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뿌듯해짐을 느꼈다.

붉게 익은 고추를 따고 참깨와 땅콩도 수확한다. 여름이 절정에 도달할 때, 비닐이 깔린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는 것은 고역이었다.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이 비닐에서 반사되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고추 밭고랑에서 일해야 하므로 금세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수확의 기쁨이 있으니 더위도 참아야 하는 것이 농사일이다.

밭에서 따 온 고추는 마당에 자리를 깔고 널어 말렸다. 햇볕이 좋아 몇 날 동안 말리면 고추 색깔이 곱게 되고 안에서 달그락달그락하는 고추씨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큰일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비가 후드득 떨어지면 쏜살같이 달려와 말리던 고추를 정리하여야 했다. 지금에야 기계를 이용하여 고추를 쉽게 말린다. 그럼에도 최상품은 역시 자연 그대로의 햇볕에 말린 고추, ‘태양초’란다.

우리들의 정성으로 잘 말려진 고추는 상·중·하 품질별로 분류하여 큰 마대자루에 담아서 아래채 방에 보관하여 둔다. 때가 되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는 장사꾼에게 가을의 수확물을 판매하여 소중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지게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집이나 정미소로 운반하였다. 물론, 도로가 허락된다면 리어카를 이용하여 운반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지게 외에 나와 형이 사용하는 지게도 있었다. 아동용 지게인 셈이다. 크기가 아버지 것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많은 짐을 질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짐이 엄청나게 컸고 아버지의 위용(偉容)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앞서가는 아버지의 짐이 작아질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쓰라렸다.

기나긴 농사철이 지나 겨울이 되면, 수확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남은 씨앗으로 새봄을 준비한다. 농사일로 지친 몸을 따뜻한 장작불로 녹인다. 체력도 비축한다. 물론, 방을 따뜻하게 데울 장작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틈틈이 산으로 가야만 했다. 겨울 동안땔감을 부지런히 모아야 겨울을 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작을 모아 두었다가 다음 겨울까지 땔감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나무는 거의 모두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고, 그루터기도 땅을 파서 지게로 지고 와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갈퀴로 솔방울이나 솔잎을 끌어모아 불쏘시개로 사용하였다. 자연스레 산지는 줄어들 뿐만 아니라 나무가 없는 민둥산으로 변해갔다. 우리 집에는 약재로 쓰이는 도라지나 지황(地黃)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도라지나 지황은 껍질을 깎아서 말려야 했다. 사용한 건전지 껍질을 떼 내어 칼 대용으로 도라지나 지황을 깎아 말렸다. 우리도 기나긴 겨울밤을 전깃불 밑에서 도라지나 지황 깎는 일을 도와주었다.

지황의 경우에는 말리는 방법이 독특하였다. 사랑방에 장판을 걷어 내고 청소를 하였다. 그다음 깎은 지황을 방바닥에 골고루 깐 다음 그 위에 멍석을 깔았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게 되면 방이 따뜻해지고 지황이 점점 마르게 된다. 아버지와 형, 나는 주로 사랑방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남자들은 사랑방에서 잠을 자고, 어머니를 포함하여 여자들은 안방에서 잠을 자는것이 관례였다. 우리는 황토벽으로 된 사랑방 멍석 위에서 본의 아니게 지황 뜸을 뜨게 되는 것이다.요즘은 돈을 주어도 경험하기 어려운 호강을 한 셈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인가, 그해 엄청 가뭄이 들었다. 밭에 씨앗을 뿌리는 시기는 물론이고 논에 벼를 심어야 할 시기에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싹을 틔운 농작물도 모두 말라 죽었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논에 어떤 농작물이든 몇 포기라도 살아 있어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온 가족은 곡괭이로 돌덩이 같은 논바닥을 팠다. 곡괭이가 튕겨 나왔다. 그렇게, 겨우 메밀 몇 알을 심어서 몇 푼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날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나는 다짐하였다. ‘나는 커서 절대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할 일 없으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라.”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사는 낭만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돌이켜 보면, 시골 겨울은 참으로 길었다. 밖에 함박눈이 쌓이거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밤, 두런두런 인생 얘기, 자식 얘기를 하시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워진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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