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중학교 생활은 그다지 힘든 생활은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이용하여 통학하는 것은 나름 고충이 있었으나 어차피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어머니가 밥을 해 주시고, 빨래도 해 주시니 의식주는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안동 시내에 있기 때문에 통학이 불가능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시내 다른 사람의 방을 임차하여 자취 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1980년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역별로 ‘고입선발고사’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골 중학생들이라도 수험생이 되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당시에는 시골은 물론 안동 시내조차도 변변한 입시학원이라는 것이 없었고, 시골의 경우는 교과서나 ‘전과(全科, 참고서)’ 이외 공부할 만한 자료가 귀하던 시절이라 공부의 분량은 적은 편이었다.
주말 오후에는 소를 몰고 산으로 가 고입선발고사 공부를 하였다. 집에서 기출문제집 일부를 떼 내어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고 산에 가져가 공부를 하였다. 소는 자기 혼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기출문제를 풀었다. 소도 먹이고 공부도 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형이 다른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어서 두 고등학교 가운데쯤 되는 곳에 자취방을 임차하였다. 큰 도로에서 나와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우리 자취방 외에 다른 자취방이 1개 더 있었는데,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형은 걸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나는 거리가 멀어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학교에 다녔다. 화창한 봄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낙동강 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
주중에는 자취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토요일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시골로 들어가 농사일을 도왔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 쌀이나 김치, 밑반찬을 가지고 시내로 나와 다시 한 주를 시작하였다.
자취 생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점도 많았다. 첫째, 겨울에는 연탄불을 이용하여 난방을 하고 빨래에 필요한 물도 데워야 했다. 춥게 자지 않으려면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이 들어가는 마개를 돌려서 불을 조절을 하는 방식인데, 타는 속도를 잘 조절하여야 방이 항상 따뜻하게 되고 다 탄 연탄을 교체하는 시간도 일정하게 된다. 연탄은 일산화탄소를 방출하므로 중독되면 죽을 수도 있다. 비가 오는 등 저기압 날씨나 방바닥의 상태가 불량한 경우 아주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학생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둘째, 스스로 밥을 짓고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야 했다. 아침에 쌀을 씻고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미리 쌀을 씻고 전기밥솥에 밥을 얹어 놓는다. 물론 바로 쌀을 씻어서 지은 밥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타이머를 맞추어 두면 새벽에 밥이 익는 소리가 났다.
밥을 퍼서 도시락을 싸고 혼자서 아침을 먹었다. 전기밥솥에 붙어 있는 밥알을 설거지하지 않고 물을 부어 두었다가, 저녁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전에 집에 내려와 그대로 라면을 삶아 먹기도 하였다. 밥은 전기밥솥을 이용하여 지으면 되지만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 가는 것이 큰 문제였다. 멸치나 쥐치에 고추장과 간장, 설탕과 소금을 조금 넣고 마구 버무리도 하였고, 겨울에는 배추를 잘게 썰어 역시 간장과 설탕을 조금 넣기도 하였다. 임시방편으로 반찬을 만드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도시락 반찬을 펴 놓고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 반찬을 당당하게(?) 내놓고 친구들이 싸 온 계란이나 햄, 소시지 같은 맛있는 반찬을 먹었다. 그런데, 내가 싸 온 반찬은 친구들이 거의 먹지 않았다. 몰론, 나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내 도시락 반찬을 대신 마련해 준 꼴이 되었다.
셋째, 빨래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취 집 마당 한가운데 수도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빨래를 하여 빨랫줄에 널어 두었다. 자취생들이 모두 남자이므로 그냥 퍼질러 앉아 빨래를 하였다. 여름에는 빨래하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나 겨울은 상황이 달랐다. 수돗물이 차가워 제대로 빨래를 할 수 없었다. 찜통에 물을 채워 연탄불 위에서 데운 후 마지막 헹구는 데 아껴서 사용하였다. 당시는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라 손이 꽁꽁 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속옷이나 양말 등 간단한 빨래는 감내할 수 있었으나 겨울철 두꺼운 점퍼나 바지 빨래는 고역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학교 식당에서 마련한 식사를 하였다. 잠자리나 샤워하기가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아침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만큼 공부에 열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이 흘러 자취 생활을 하던 집들은 모두 헐리고 지금은 도로가 되거나 빌라가 들어섰다. 그래도, 우리가 살았던 자취 집 주인 식구들, 같은 집에서 자취를 했던 친구들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자취 생활은 초임검사 시절 결혼을 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도 밥을 짓고 반찬도 몇 개는 만들 줄 안다. 라면도 잘 끓일 수 있다. 그러나, 부엌 근처에는 얼씬거리기도 싫다. 굳이 변명하자면, 오랜 세월 자취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