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나는 낙성대에 있는 고시원에서 생활하였다. 베니어판으로 만들어진 저렴한 고시원이었다. 2층 전체가 고시원이었는데 복도에 듬성듬성 백열등이 달려 있는 어두침침한 구조였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옆방과 사이에 베니어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화장실과 세면장도 20여 명의 고시원 사용자들이 공용으로 사용하여야 했다.

그러니 빨리 일어나 학교로 가 공부를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졸업을 하고서도 직장을 얻지 못하고 고시 공부를 하여야 했으므로 생활비가 필요하였다. 교재를 구매할 비용도 필요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돈, 가족이 도와준 돈도 있었으나 부족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1995년도 후반부터 인근 동네 입시학원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 일을 하였다. 1주일에 3일 정도 시간을 정하여 강의하였다.

당시 사법고시는 1차 시험이 객관식으로 6과목, 2차 시험은 주관식으로 7과목, 3차 시험은 면접이었다. 나는 1차 시험에서는 필수과목인 헌법, 민법, 형법을, 선택과목으로 형사정책, 경제법, 영어를 보았다. 2차 시험에서는 공통과목인 헌법,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상법 등 7과목을 보았다.

1996년부터는 조금 더 큰 입시학원으로 옮겼다. 임팩트 있게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페이가 더 세기 때문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등 3개 반을 맡아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6시부터 11시까지 풀로 국어강의를 하였다. 경쟁자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1주일에 10시간 이상은 손해를 보았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 학원을 오가는 시간도 당연히 손해를 보는 시간이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1997년 사법고시 1차 시험이 다가오고 그간 공부한 것을 마무리하여야 했다. 학원 원장님과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학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자비심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1997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짧은 기간 동안 2차 시험 과목을 공부하였고, 다음 해를 기약하는 차원에서 그해 2차 시험에 들어가 분위기를 보았다. 당연히 시험에는 불합격하였고, 반 이상의 과목에서 과락이 나왔다.

1차 시험에 합격한 후 더 이상 강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어야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이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고시 낭인’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학교 도서관으로 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였다.  내가 최종적으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터디 팀 구성원들 덕분이었다. 우리 스스로 ‘서울대학교 도서관팀’이라고 불렀다. 약칭하여 ‘SLA(Seoul national university Library Association)’. 멋있는 이름이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주로 공부하는 학생들의 스터디 팀이다.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40명이 뭉쳤다.

서울대학교 출신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78학번 형님부터 시작하여 89학번이 막내였는데, 내가 88학번이었으니 막내급에 속하는 고령 스터디 팀이었다.

40명을 5개 팀으로 나누어 8명씩 한 팀이 되었다. 각 팀에서는 팀장을 제외하고 2차 시험 과목이 7과목이므로 한 과목씩 과목 담당을 정하였다. 학습 교재나 진도, 학원 수강 여부 등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팀장 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각 과목별로 새로운 판례가 나오거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한 경우에는 과목 담당 회의를 열어 학습 내용을 공유하였다.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1998년 6월 26일, 마침내 2차 시험일이 되었다. 시험은 총 7과목으로 4일 동안 치러졌다. 주관식 서술형인데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글씨를 빨리 써야 하고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핵심도 적시하여야 했다. 내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글씨를 빨리 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답안지 마지막 장, 마지막 줄까지 빡빡하게 답안을 적었다. 비록 내용이 부실하지만 많은 내용을 적시하다 보면 그중에서 출제자가 원하는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줄까지 답안을 쓴 성의를 보아 최소한 과락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전이었다.

드디어 길고 긴 사법시험이 끝났다. 시험이 끝나고 마냥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2차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지출이 많았으므로 다시 입시학원 강사를 하기로 하였다. 배운 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재주가 없었다. 1주일에 서너 번 동네 조그만 입시학원에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어를 가르쳤다. 시험공부를 할 때는 공부에 대한 부담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나 이제 시험이 끝난 마당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때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저녁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낮에는 사법고시 2차 대비용 행정법 책자를 저술하였다. 우리 스터디 팀 과목 담당별로 시리즈 수험서를 7권을 내기로 한 것인데 내가 행정법 담당이었기 때문에 행정법 과목을 맡았다. 중고 컴퓨터도 1대를 마련하여 작업하였다.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인쇄료도 정하여 얼마 정도의 선불금을 받았다. 소중한 돈이었다. 그 돈으로 행정법 교재 및 관련 서적을 구입하였고 생활비에도 보탰다. 행정법 책자도 조금씩 모습을갖추어 가고 있었다.

1998년 11월 7일, 사법고시 2차 시험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통상 합격자 발표는 오후 5시나 6시쯤에 있었고, 고시촌 몇몇 서점에서는 합격자 명단을 붙여 놓았다. 그날도 나는 입시학원에서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자취방 후배에게 발표 명단에 내 이름이 있으면 학원 사무실로 전화하여 합격하였다는 메모를 남겨두고 내 이름이 없으면 전화를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는 내가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불가피하였다.

학원에서 1시간 강의를 하고 저녁을 먹고 들어왔는데도 후배는 연락이 없었다. 초조하였다. 다시 1시간 강의를 하고 교실에서 나왔는데도 학원 원무과에서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 이렇게 시험에 떨어지는구나. 다시 도전해야 하는가, 이대로고시 낭인이 되는가’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다시 1시간 강의를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억이 없었다.

그날 강의를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원감선생님이 어떤 메모지를 들고 나에게 와서 “시험 합격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원감선생님은 내가 사법고시를 본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 메모지에는 내 수험번호와 합격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드디어 사법고시 합격이다!’ 고함을 치고 싶었으나 차분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급히 후배와 통화를 하였고,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진짜로 사법고시 합격이다!

드디어 3년 6개월 동안의 길고 긴 사법고시 공부가 끝났다. 경쟁자들과 출발선이 다른 상태에서 일구어 낸 나만의 인간승리라고 생각하였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격해 있었고 “잘했다.”는 말씀을 연발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했다. 고생한 만큼의 보람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내가 꿈꾸던 시험에 합격하였으니 그날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해 11월 중순경에 3차 시험인 면접을 보았고, 11월 27일에 제40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총 700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고 수석합격은 평균 63.71점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당당히 들어 있었다.

합격의 기쁜 소식을 들은 이후 행정법 책자를 만드는 작업도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해 12월 행정법 원고를 마무리하였고, 1999년 1월 스터디 팀의 시리즈 수험서가 출판되었다. 2차 시험 7과목 전부가 책자로 나오지는 못하였고 4과목만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일부 선배들은 고시촌에서 저자 직강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사법연수원을 다니면서도 신림동 자취방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연수원 시험이 있을 때는 나도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가끔 수험생들이 내가 쓴 책으로 스터디를 하는 것을 보았다.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다. 이후 2001년에 행정법 개정판이 출판되었으나 검사 임용을 받는 바람에 반 정도만 개정하였다. 내용 요약 부분은 완성이 되었으나 뒷부분에 배치되어 있던 판례 분석은 개정하지 못하였다.

검사 임용을 받자마자 처리해야 할 기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행정법 판례를 분석하여 평석할 수는 없었다. 당시에 맡은 업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한동안 인쇄료도 받을 수 있었다. 몇 년 동안은 세금 계산까지 완료된 인쇄료가 통장으로 들어와 신기하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행정법 책자가 절판(絶版)이라 국립도서관 정도에 가야 찾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나는 정확히 3년 6개월 동안 사법고시를 공부하였다. 그 이전 행정고시 공부까지 포함하면 총 4년이 소요되었다. 법대 출신이 아닌 상태에서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 상당히 짧은 기간에 합격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가면서 시험공부를 하였다.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합격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보상되고 합리화되었다.

정해진 적성이나 운명이 없이 어쩌면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지성(至誠)만큼 감천(感天)하여 마법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인생 2막을 시작하였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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