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 앉아 거대한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면 내가 다녔던 예전의 학교가 마치 이곳이었던 같은 착각에 빠진다.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나무들, 그때 이렇게 버젓한 캠퍼스가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조금은 흐뭇해하셨을까?
추억은 아픔과 누추함까지도 다듬어 아름답게 보여주는 힘이 있다.
용인대학교에서 모교인 한국체육대학교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은사님의 강압 때문이었다.
1995년 어느 날 한국체대 태권도 지도교수님이 보자고 했다. 체육철학 교수를 초빙하니 한국체대로 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다.
학부생 시절 태권도 지도교수였던 이승국 교수였다. 단숨에 거절했다. 우선 국립이라 연봉이 월등히 차이가 나는 데다 집이 멀어 오고 가고 4시간을 길에서 허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을 팔고 이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도 정성을 들인 집인데다가 아이들도 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 서울로 전학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또 다시 용인 집으로 찾아왔다. “자네 지도교수 왈, ‘만약에 이번에도 이력서를 내지 않으면 사제 간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전하라 했네.”
내겐 학문적 스승과 태권도 스승이 있다. 이광섭 교수님은 학문을 하게 한 스승이다. 내가 체육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결정적 영향을 미친 분이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늘 얘기 했는데 자신이 학위를 준 나를 후계자로 삼을 리 없다. 공연히 한 말일 것이다. 그 제안이 사실이냐 되물었다. 그 교수는 다시 한번 전한다며 ‘사제 간은 이것으로 끝이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모교 출신 중 처음으로 이론교수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내도 돈보다는 모교의 명예를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거들었다. 오랜 생각 끝에 모교의 교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루 4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 있었다.
첫 출근 날, 그때도 플라타너스는 지금처럼 장엄하게 서 있었다. 이직 후 첫 목표는 태권도학과를 개설하는 일이었다. 용인대가 1982년 국내 최초로 태권도학과를 개설했고, 경희대가 그 뒤를 이었다.
국립대학에 태권도학과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용인대를 모델로 2년간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1997년에 드디어 태권도학과를 개설해서 신입생을 받았다.
현재 국내 1, 2위를 다투는 태권도학과는 그렇게 탄생했다. 무용과를 제외한 여섯 개 학과를 모두 거치며 풍부한 경험을 쌓은 나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해 나갔다. 모교 출신들이 손가락질 받는 일이 없기를 바랬고, “한국체대 출신답다, 그 학교 출신은 다르다”라는 말을 듣기를 원했다.
이 시기 나는 학생들 교육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을 쪼개 써야 했다. 체육 교사 시절부터 언젠가는 실기를 지도하는 전투사령관이기보다는 이론지도를 위한 교수로서 해야할 역할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직 후 달라진 교육 환경으로 이론교수로서 해야 할 역할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 논문이나 서적은 태권도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태권도 철학, 태권도 역사관 정립, 태권도 정신과 관련된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수많은 논문을 써서 학회지에 발표했고, 사회적 직책들도 하나 둘씩 늘어났다. 동분서주하며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한껏 끌어올렸다. 대한태권도협회 위원장을 맡아 각종 세미나와 학회를 개최했고,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심의회 위원으로 해외로도 업무를 확장해나갔다. 교육자로서 역량이 무르익는 시기였다.
2002년부터 6년간은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을 맡아 태권도 경기발전 심포지엄, 전자호구공청회 등의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제학술대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학술 심포지엄 등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태권도 용어와 개념, 도복과 띠의 철학적 탐구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는 개인적 사기로 시련을 겪느라 미국을 오가며 바쁘고도 힘들었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가끔 고통을 잊게 했다. 이직 후 바로 집을 사기로 잃었기 때문에 거리가 너무 머니까 고생하지 말라고 신께서 집을 거둬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캠퍼스 옆은 올림픽 공원으로 늘 사람들로 붐빈다.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공원은 가끔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훌륭하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공원 오솔길을 걸으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달래고 교육에 관한 생각도 정리하곤 했다.
명문대학으로 우뚝 선 한국체육대학교, 본 대학 출신 교수로 일한다는 자긍심도 사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넓은 잎을 펄럭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플라타너스를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떠올랐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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