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참 얼토당토않은 빚으로 고생하고 있을 무렵 가르치는 일 외에는 특별한 낙이 없었다.
사람에 대한 실망도 그렇고, 갚아야 할 빚도 너무 버거웠다.
혼자라는 이유로 유혹은 넘쳐났다. 술자리에 골프에 손만 뻗으면 언제라도 곁길로 샐 수가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밤 문화는 타락의 문화다.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차라리 공부에 몰두해보자.
찾아간 곳이 홍익대학교 미학과였다. 체육철학으로 이미 박사 학위를 받았기에 미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나 더 취득할 참이었다.
사실 미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나라 미학의 거두인 임범재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지 한 가지 주제가 나오면 밤 10시가 넘도록 지칠 줄 모르고 해박한 지식을 쏟아냈다. 본래는 3시부터 6시까지가 수업이었다. 그런데도 그 선생님의 수업은 저녁 식사 시간도 없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하는 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야말로 교수의 표본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매료되었고, 그분을 통해 플라톤을 만나게 되었다.
내 전공과목은 체육철학이다. 운동하는 사람이 철학을 모르면 안 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출석부 겉장에 ‘체육철학’이라는 라벨을 붙이려고 종이를 오리다가 잘못해서 체육철학의 글자가 체육과 철학으로 반쪽이 갈라지는 바람에 철학이라는 단어의 반대편에서 바라 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체육 쪽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철학 쪽에서 인간의 신체활동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평소 철학과 체육이 합쳐져야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문제에 관한 강의를 임범재 교수가 하고 있었다. 임범재 교수는 플라톤의 ‘선미인’에 관해 강의했다.
플라톤은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신체의 본성적 욕망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나야 한다며 ‘신체는 영혼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화편인 ‘파이돈’에서는 영혼과 조화를 이루어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선미인(kaloskagathos)이 되려면 교육상의 필수 요건으로 신체를 들 수 있다고 표현했다. 즉 그가 주장한 신체경멸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범재 교수는 내가 궁금해 했던 문제점을 줄줄 풀어내면서 나를 플라톤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의 공부는 내가 체육인으로서 교육자의 길을 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 문제를 아주 쉽게 아버지가 말한 ‘운동하면 무식하다’와 내가 주장하는 ‘머리가 좋지 않으면 운동을 못 한다’라는 말의 최상위 개념으로 해석했다. 일반인들이 이야기하는 ‘무식하다’라는 ‘식’에는 단순 지식이나 정보를 수집해 삶에 적용하는 차원을 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까 일반인으로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영혼까지 연결되는 깊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무식은 지식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본질에 대한 이해가 지식이며 그것을 알아야 영과 혼이 어우러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그 집요한 질문들도 사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문답이다.
점점 학문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시작했지만 내 열의를 알아챈 교수는 석사학위 과정을 들어오지 말고 연구과정으로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독일에서 공부한 임홍빈교수가 있으니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해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연구과정으로 플라톤을 꾸준히 공부해 결국은 임범재 교수가 추천한 대로 2010년 서양철학 전공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서양철학의 대가 임홍빈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대학원 철학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초창기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석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는 한 젊은 학생이 이미 체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았다. 희랍어를 영어로 번역한 고대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원전의 영어 번역에 오류가 있다고 끊임없이 지적하는데, 영어는 물론 희랍어까지 통달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교수와 학생이 서로 문답을 주고받으며 수업을 진행하는데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의 내용은 기본으로 하되 희랍어를 최소한 읽을 수는 있어야겠다고 마음먹고 화장실에서도 침대에서도 시간만 나면 희랍어 알파벳을 붙여놓고 공부에 몰입했다. 그 덕에 6개월이 지나서야 해석은 불가해도 어느 정도 희랍어를 읽을 줄은 알게 되었다. 그러자니 술 먹자고 누가 불러도 나갈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나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박사과정에서 고대철학 전공인 손병석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두 분의 공동 지도하에 ‘플라톤의 신체관’이라는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논문의 결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체는 우리의 살아있는 존재의 바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는 가까이에 있다는 친숙함으로 인해 오랫동안 철학적 논의에서 제외되곤 하였다. 틀림이 없는 것은 신체가 철학적 사유로부터 멀리 떨어져 배타적으로 고려되어 왔다는 것이다. 즉 우리와 가장 가까이 존재해 있는 신체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존재했더라도 지극히 국소적인 부분이었다. 대부분은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었다. 철학의 역사에서 신체나 감성의 문제는 이성이나 합리성과 같은 위치 속에서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인식의 대상으로서도 동등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은 신체가 그 어떤 대상체보다도 인간 삶의 존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인간의 이성적 부분에 의해 통제받는 부속적인 현상으로 전제하였던 것이다. 서구 문명의 질서는 반드시 숙명이나 자연적 필연의 궤적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문명의 역사가 오히려 이성과 감성,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의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합리화 과정은 신체의 정신에 대한 관계에서 규범적으로 통제 되어야 하는 실체적 관점을 고수해온 것이다. 신체가 그 자체의 복잡성에 상응하는 언어적 체계나 합리적 방
식에 의해 이해되기 어렵다는 편견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신체는 주로 질병의 치유나 단련이라는 의학적 분석의 대상이나 단련과 도야의 대상으로 물상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신체가 그 고유한 질서에 의해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관념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는 곧 철학 자체가 정신주의나 이성 중심주의에 경도되었음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신체의 철학은 단순히 기존의 철학에 하나의 새로운 연구대상을 추가하거나 연구의 새로운 중심축의 이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체의 인문적 이해는 오히려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적 분리의 관점은 물론, 실체로서의 신체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관점을 극복하고,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진 전일적이며 통일적인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체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추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심신통일체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기술한 플라톤의 신체 철학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관점이 고대 그리스의 신체 문화에서 나타나는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에서의 윤리적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혼이지 신체가 아니기 때문에 통속적인 플라톤 해석에서 보여지는 ‘영혼은 선이며, 신체는 악이다’와 같은 극단적인 단순화는 성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체에 대한 영혼의 관여 방식으로 선과 악의 대립을 파악하는 것이 온당한 접근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인간으로 있는 동안은 영혼이 주인이기 때문에 신체는 영혼의 수단이며, 도덕적 악행의 주체는 신체라기보다는 영혼에게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플라톤의 『파이돈』 편이 영혼 우위의 철학을 강조하면서 신체의 의미와 그 기여도를 철저하게 부정하였으나, 신체는 도덕적 악의 대상으로 보는 신체 경멸시 사상을 강조한 전형적인 저작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확한 독해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국가』 편이나 『법률』 편 등의 여러 대화편을 통하여 오히려 수호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향한 영혼의 양육과 더불어 신체 교육의 필요성을 다양하게 언급하였다. 신체 교육을 통하여 덕을 함양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용기의 덕을 위한 신체 교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플라톤의 신체관은 현대에 이르러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의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탁월함의 경쟁 속에서 스포츠 활동의 참다운 가치를 만들고 그를 통해 쾌(快)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중략 -
현대에 이르러 신체의 탁월성을 견주는 스포츠 현장에서는 승리 지상주의에 물들어 신체를 혹사하고, 신체의 기능적인 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신체가 병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금권주의와 상업주의로 인해 인간이 스포츠를 하는 인간이 아닌 운동하는 기계로 전락하기도 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덕스러운 인간으로 향하기 위한 상승에로의 욕구가 충만해야 할 경기 현장에서 스포츠맨십이라는 덕스러움은 사치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운동선수가 은퇴한 후에 그들의 삶은 신체적 기능이 퇴색했다는 좌절감에 빠져 스포츠로 갖추어야 할 정신세계를 망각하는 경우가 있음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체육 일반의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신체 만들기에 급급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신체관은 건강한 삶, 훌륭한 삶, 그리고 체육의 가치에 대해 성찰할 만한 것들을 충분히 전해준다. -이하 생략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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