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사기로 날린 뒤 전세조차 얻을 돈이 없었다. 그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미국으로의 이주였다. 미국은 우선 집을 얻는 데 목돈이 필요치 않았고 매월 월세만 내면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다. 내가 받는 급여로 월세를 해결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면 될 것이다. 미국은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됐다.
당시 이곳에서는 아이들 학원 보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집을 바로 비워주어야 할 처지여서 급히 매매를 한 후, 미국으로 이주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집안 사정을 알 리 없는 딸아이는 빨간 원피스가 입고 싶다며 사달라고 졸랐다.
대학교수로 그깟 어린아이 원피스 정도야 너끈히 사주고도 남을 터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마음에 걸려 하고 있는데 장모님 옆집인 아파트 804호에서 자신의 딸이 커서 입을 수 없는 고급 원피스가 있는데 민지를 줘도 되느냐고 물었다. 교수 집 아이이니 남이 입던 것을 줘도 되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다.
아내는 다행이다 싶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다 딸에게 입혔는데 너무 좋아하며 며칠을 그 원피스만 입었다. 그게 얼마나 마음에 걸렸으면 아직도 그 원피스의 색깔과 무늬가 기억에 있다. 빨강에 가까운 진분홍이었는데 하얀 꽃무늬가 드문드문 놓여져 있었다. 딸은 하필 그 무렵 유난히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로선 바이올린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플라스틱으로 된 빨강 장난감 바이올린을 사다 주었다. 딸아이는 그 장난감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흉내 내며 즐겁게 갖고 놀았다. 딸이 어릴 때부터 음악적 소질이 탁월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국에 있을 때도 음악 이야기만 딸 민지와 바이올린하면 속이 깊은 딸은 일부러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는 그때의 미안함이 지금도 가슴에 옹이처럼 남아 있다.
용인대 조교였던 고승현 선생이 내쉬빌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가기로 일단 마음먹고 아내와 의논을 했다. 어떻게 가족이 떨어져 사느냐며 아내는 울먹였다. 집을 날리고 남은 돈은 겨우 2천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부엌에 방 두 개 달린 전세를 알아보니 4천만 원이었다. 미국은 월 700불만 지급하면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을 선택했던 것이다. 각각 천만 원으로 우선 버텨볼 생각이었다.
나는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설득했다. ‘대학교수는 3월에 개강하면 6월 말에 종강한다. 겨울방학도 길고, 1년 중에서 6개월은 미국에 가 있을 수 있으니 우선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시켜라. 조기유학도 가지 않느냐’ 등등 아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차분히 이야기했다. 아내는 정말 미국에 자주 올 거냐고 물었다. 아내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논의 끝에 드디어 미국으로의 이주가 결정되었다.
서둘러 절차를 밟아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교수라 아이들을 조기유학 시킨다고 주위에선 부러워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유학 보낸다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엔 그런 쓰라린 사정이 숨어 있었다.
1994년 파리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기로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태권도인을 무척 반겼다. 자국에 이익이 되는 부분에선 상당히 호의적인 나라다. 까다롭기로 소문 난 미국 이민국이 태권도 모국의 출신이면서도 태권도 관련 논문을 많이 쓴 교수라는 이유로 선뜻 여행비자를 내주었다. 그리고 영주권도 바로 신청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내쉬빌에 두고 뉴욕으로 가서 영주권을 받기 위해 변호사와 계약을 했다. 나정도의 이력이라면 6개월 내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내가 생활하려면 차가 필요했기에 우선 벤츠를 한 대 샀다. 말이 벤츠지 30년이나 된 허름한 차였다. 차를 사고 월세를 지급한 다음 나머지는 비상금으로 아내에게 주었다. 염려는 됐지만, 후배가 있는지라 차차 적응해 나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무겁게 귀국했다. 신학기인데다 내가 기거할 곳을 찾으랴, 담보 뒷수습하랴 정신이 없었다. 둔촌동에 월 30만 원짜리 원룸을 얻어 대충 짐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3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던 중 아이들이 학교에 잘 다니냐고 물었더니 아직 학교에 못 들어갔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 이유를 물으니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비자로는 공립학교에 갈 수 없어서 아직 집에 있다고 했다. 너무 황당하고 걱정이 되었다. 사립은 여행비자로도 가능했으나 학비가 연 5~8천만 원이 들어 도저히 보낼 수 없었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교육청에 들어갔다. 담당자에게 물으니 아내가 한 말을 그대로 했다. 나는 이력서를 보여주며 E11 케이스로 영주권 신청을 했고, 6개월 내로 나온다고 변호사가 말했다고 했더니 그래도 현재는 영주권이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다급했다. “당신들, 인종차별 하는 거냐? 지금 아이들이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만약 영주권이 나오면 그동안 교육을 못 받은 것에 대해 당신이 책임을 지겠냐? 미국인이라도 그리하겠느냐? 이건 분명 인종차별이다. 영주권이 곧 나올 텐데 영주권이 나오면 즉시 재판을 걸겠다.” 조금은 흥분해서 항의하듯 설명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난감했는지 담당자는 교육장을 데려왔다. 내 이력서를 보면서 한참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교육장이 내게 제안했다. “영주권이 나오면 가장 먼저 복사본을 제출할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Sure”라고 대답했다. OK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이들은 다음 날 바로 학교에 들어갔다. 미국 이민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 했다. 여행비자로 공립학교에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이민 사회가 술렁였다. 여행비자로 공립학교를 들어간 첫 사례라고 했다. 이민 사회에는 지금까지도 그 일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나도 점차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둔촌동 원룸과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원룸에서 사는 동안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새벽에 나와서 밤늦게 들어갔다. 식사는 집에서 대충 해먹거나 식당에서 해결했다. 날이 눅눅한 날에는 아이들이 더 보고 싶었다.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 나오는 가족이나 먹을거리를 사 들고 총총걸음을 옮기는 군중 속에서 나는 하나의 오뚝한 섬이 되어 있었다.
기러기 아빠 생활이 언제쯤 끝날지 사실 기약도 없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 내 옆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다 취기가 오르면 쓸쓸했다. 체육인으로 단련된 당찬 나였지만 그런 겉모습 속에 진한 외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 대범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월세와 생활비를 보내느라 여유가 없었다. 30만 원짜리 원룸에 살면서 심리적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내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돼 SWISSPORT라는 회사를 통해 대한항공 현지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 현지인이 필요한 대한항공사에 아내가 적임자였다. 아내가 대한항공 직원이 된 덕에 이후 세금만 내는 싼 항공료로 자주 미국을 드나들 수 있었다. 아내에게 수입이 있으니 나중에는 용돈 정도만 보내주면 되었다. 생활비 정도는 아내 힘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몇 년 후 경제적으로 여력이 생긴 아내는 월세가 아까우니 대출을 받아 아예 집을 사자고 했다. 신중히 생각한 끝에 정원이 있는 3층짜리 집을 175,000$에 샀다. 어찌 되었든 아내 덕분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는 면한 셈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내 집이라고 하기에는 당당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 연구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 집에서는 겨우 잠만 잤기 때문이다. 연구실에 가장 오래 불이 켜져 있으니 학교에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교수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참으로 웃픈 이야기다. 그 바람에 공부를 열심히 한 것 또한 사실이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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