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처음 보았다. 그렇게나 강하던 아버지가 울다니 그게 더 충격이었다.
용인대로 이직하고 상계동에서 용인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용인에 집을 마련할 당시, 알뜰살뜰 8천만 원을 준비했음에도 7천만 원이 부족했다.
다시는 손 벌리지 않겠다 맹세했지만, 아버지가 한사코 형에게 부탁해보라고 해서 5천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등기가 이전되면 바로 대출을 받아 갚겠다고 했는데도 형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버지는 형에게 전권을 넘긴 상태에서도 나를 돕겠다고 했고, 또 도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형이 단호히 거절하자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보인 것이다.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행히도 집주인이 선 등기를 내게 해줘서 담보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었지만, 그때 형에게 서운한 맘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누구보다 호기롭고 화통했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인정이 많아서 대인 관계가 무척 넓었던 아버지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점점 사업을 버거워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노인은 아니었다.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아들을 불러올렸고 아버지는 회장으로 형은 사장으로 체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사업을 장악한 형은 차츰 아버지를 뒷방 늙은이로 전락시켰다. 그토록 철저하게 믿었던 아들이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살던 집을 장남에게 넘겨주고 물건 대금으로 받은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연탄을 때는 방 두 칸짜리 비좁은 집이었다.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이 번듯한 집 한 채쯤 당연히 지어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임시라고 생각하고 옮긴 12평짜리 허름한 아파트였다.
그러나 형은 늘 사업에 몰두하느라 바빴다. 지척임에도 자주 방문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 체면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남이 알게 될까봐 쉬쉬하는 처지였으니 그 서러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어느 날 이천으로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참았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형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 차 있었다. 생활비를 받으러 갔더니 종업원이 구걸하러 온 사람 취급을 하더라며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는 자립심이 강한 분이다. 인천의 생선 장사 시절부터 아버지를 내조하며 알뜰하게 사신 분이다. 언제나 남과 나누는 걸 좋아해 주유소 사무실은 동네 사랑방 같았다. 특히 친정 식구를 거두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넓은 품 덕분에 가능했겠지만 그만큼 어머니는 이모들을 챙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는 완고한 분이다. 내게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기도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문제로 눈물을 보인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나도 모르게 내 몫으로 이천 외곽에다 논 200평을 남겨뒀었다. 이천이 커가는 과정에서 마을이 들어서는 바람에 대지로 용도 변경이 가능했다. 나는 그 땅을 분할해서 100평을 팔아 나머지 100평에 이층집을 지어 부모님을 이사시켰다.
그리고 가능하면 주말마다 부모님을 뵈러 이천을 방문했다. 내가 가지 못하는 주말이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도록 했다. 부모를 모시지 못하면 최소한 자주 찾아뵙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아내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매주 아이들을 데리고 이천으로 내려가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과 함께 설봉산 작은 절 쪽에 자리를 잡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지금도 소주를 들이키시며 “캬~ 좋다.”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힘들어하는 막내 이모네를 이천으로 불러들여 아래층 점포를 식당으로 운영하게 했다. 이모는 음식솜씨가 좋아 손님이 많았다. 그 월세로 생활을 해서 이후로는 조금의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제천의 외조부모 산소에 비석을 세우는 일까지 도맡아 할 정도로 아버지는 품이 넓은 분이었다. 하지만 형이 사업을 물려받은 뒤로 경제권이 없는 힘없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철통처럼 강하던 아버지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고혈압으로 쓰러져 앓다가 1996년 7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타개했다.
참으로 묘하게도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과 형의 마지막을 필연인지 우연인지 내가 지켜보게 되었다. 가족이 숙명적인 관계인 건 분명하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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