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강한 소리가 운동장을 크게 흔들었다. 구령대로 뛰어 올라가 마이크를 세게 치자 강하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일순 하늘로 퍼져나갔다. 아이들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가장 낮은 목소리로 ‘열중쉬어’ 구호를 붙였다. 아이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운동장 맨 끝 한창 장난에 빠진 녀석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리곤 가차 없이 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이는 옆으로 퍽 고꾸라졌다.

가만히 일으켜 세운 뒤 아무 말 없이 서슬이 시퍼렇도록 눈을 응시했다.

당사자는 물론 웅성거리던 모든 학생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1985년 5월 28일, 인덕공고 첫 출근 날 벌어진 일이다.

지금 같으면 폭력으로 고발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량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으로 체벌이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반항 풍조가 강한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체벌을 교화의 위대한 힘으로 믿었던 시절이었다.

첫 출근 후 조회 시간이 되었다. 교련선생이 구령대에서 우향우, 좌향좌하는데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저희끼리 장난치며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해병대표팀에서 제대한 지 얼마안 된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분위기를 잡아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제 막 부임한 애송이 교사가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은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표정을 보냈다.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땅’- 그렇게 인덕공고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이후 조회 시간은 서서히 질서가 잡혔다. 대학 진학은 축구부 학생 한둘이 가는 게 고작이었다. 대학을 목표로 온 아이들이 아니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부 모범생들만 진로를 탐색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을 뿐이다.

교사의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우선 반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 열 명씩을 차출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봤다. 전문가들은 선수를 보면 금방 가능성을 찾아낸다. 즉 그 선수가 축구에 어울리는지 태권도에 어울리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도 별로 어렵지 않게 학생을 선별해 냈다. 그리고 선언했다. 반드시 4년제 대학에 보낸다.

아버지 생각과 반대로 나는 머리가 나쁘면 절대로 운동을 잘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명석한 아이들을 선택해서 태권도 선수부를 만들었다. 공부도 공부거니와 여러 면에서 제대로 인정받을 기회가 적었던 아이들이 많았다. 경쟁에서 밀리고 미래는 불투명하기에 아이들의 불안감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들을 잘 안내하는 것이 교육자의 길이다. 우선 아이들에게 성취감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건강한 생각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잘 따라주었다. 마침내 그해에 졸업을 하는 학생 6명을 모두 4년제 대학에 입학시켰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자신들도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활기를 찾았다. 2년 후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이들은 태권도부로 몰려들었고, 대학입학에 대한 희망은 다른 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 인덕공고 태권도부(사진=뉴스후플러스)
1987년 인덕공고 태권도부(사진=뉴스후플러스)

태권도부에서 3년간 버틴 학생들은 100% 대학에 들어갔다. 경희대, 한양대, 용인대, 계명대 등에 보란 듯이 입학을 한 것이다. 당시 인덕공고로서는 혁명에 가까웠다. 다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며 궁금해했다. 물론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큰 성취이고 대학은 성인이 된 후 사회인으로 인정받는 첫 관문이다. 한번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체험을 안겨주고 싶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지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문 코치를 채용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훈련과 수업, 학교일까지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전문 코치처럼 훈련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해병대 선수단 시절 능력 있는 코치를 통해 승리를 거뒀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당연히 평소에 한 말도 있고 해서 한국체대 후배를 채용하려했다. 하지만 나를 가르쳤던 한국체대 이규석 교수님이 용인대로 가면서 용인대 출신을 코치로 써야만 했다. 나는 후배를 채용하고 싶었지만, 스승님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를 공부하는 운동선수로 인도한 분이다. 이 일로 나는 모교로부터 완전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후일 동문회에서 “여러분은 스승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다음부터는 반드시 후배를 채용하겠습니다.”라고 해명을 해서 겨우 관계를 회복했다.

태권도 (그림=고우영 화백) / 뉴스후플러스
태권도 (그림=고우영 화백) / 뉴스후플러스

용인대 출신 권혁중 코치와는 손발이 아주 잘 맞았다. 마치 부모처럼 아이들을 교육했다. 코치에게 야단을 맞으면 내가 감싸고, 내게 혼이 나면 코치가 감싸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아이들의 사기가 진작되었다.

어느 날, 185㎝의 장신에다 유연성이 탁월한 헤비급 학생이 태권도부에 들어왔다. 디자인과 학생이었는데, 체격을 보고 태권도부를 하라고 불러들인 것이다. 6개월 후 전국체전 고등부 서울시 대표선수 선발전이 있었다. 기간이 짧아 겨우 기본기만 가르친상태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코치석에 앉아 하나하나 동작을 지시했다. 체격이 워낙 좋은 선수라서 돌려차기 기술 하나만으로 결승전에 도달했다.

결승전 상대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3위를 한 탑클라스로 의심할 여지 없는 우승 후보였다. 이미 대학에서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인정받은 선수였다. 2회전까지 3:0으로 지고 있었고 곧 한 회전만 지나면 게임이 종료되기 직전이었다. 당시 최정근 선수는 왼발잡이였다. 평소 기본기에 충실하기 위해 절대 돌려차기 외에는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코치는 몰래 다른 발차기도 가르치고 있었다. 그 학생은 체격이 월등했으나 체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멘탈도 그리 강하지 못했다.

학생은 이미 포기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했다. 2회전이 끝난 휴식 시간에 나만 믿고 따르라며 내가 시키면 순간 왼발 뒤후리기를 하라고 지시했다. 평소 뒤후리기 동작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돌려차기 연습만 하라고 했던 나였기에 학생은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무조건 내 말을 따르라고 했다.

쉬는 시간에 페트병에 물을 담은 뒤 학생에게 마시라고 했다. 플라시보 효과를 위한 나의 계략이었다. 물에 특수 영양제를 탔는데 순간적인 힘이 발휘되니 마시라고 했다. 이 영양제를 마시면 저절로 힘이 불끈 솟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선 공포감에 떨고 있는 선수의 멘탈을 바로 잡아야 했다. 선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힘이 나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냥 수돗물이었다.

3회전이 시작되었다. 상대 선수는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여서 의기양양했다. 당연히 우승은 그의 것일 거라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3회전에서 그 학생은 내 지시에 집중하며 뒤로 빠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상대의 공격에대응하지 말고 뒤로 빠지라고 지시했다. 우리 선수는 여지없이 몸통을 걷어차였다. 그래도 염려하지 말고 뒤로 빠지라고 했다.

상대의 무릎을 유심히 보던 나는 짧고도 강한 소리로 ‘차’를 외쳤다. 순간 우리 선수는 왼발로 뒤후리기를 했다. 상대는 오른 발을 잘쓰는 선수였고 우리 선수는 왼발잡이니 갑작스러운 뒤후리기 동작에 당할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상대선수는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결과는 KO승이었다. 내 지시가 적중했던 것이다. 관중석은 요란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아이들은 나를 완전히 신뢰했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훈련할 때는 무서운 호랑이였지만 일상에서는 곰살맞게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냈다. 아이들은 나를 신뢰했고 학교생활도 즐거웠다. 아이들과 전지훈련을 가서도 밤이 되면, 논문을 쓰거나 열심히 이론 공부에 전념했다. 당시는 아직 어려운 시절이어서 수업료를 내지 못하거나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하거나 합숙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은 내가 대신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사 월급으로 학생들을 건사하다 보면 언제나 생활비는 부족했다.

그즈음 첫 아이가 탄생했다. 딸 민지였다. 아버지가 되는 기분은 감격스러우면서도 낯설었다. 나로 인해 태어난 생명이 경이로웠지만 한편 이젠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책임감으로 마음이 묵직했다. 당시 나에겐 몇십만 원의 돈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연분만 할 것으로 알고 그 정도의 돈도 애써 비축한 것인데 아내는 오랜 진통 끝에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병원비가 80만 원이나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5백만 원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하는 수 없이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가계수표를 끊어 겨우 퇴원했다. 그 정도로 살림이 빠듯했다.

아내는 내가 학생들을 돕는 것에 대해 별 이견이 없었다. 속으로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나보다도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찾아오는 아이들 밥해 먹이느라 바빴고, 합숙할 때면 식사를 해줄 인력을 구할 돈이 없어 만삭인 아내가 직접 밥을 해주기도 했다. 그때 밥도 함께 먹고 고된 훈련도 함께했던 제자들은 대부분 훌륭한 사회인이 되었고, 그들은 지금도 내 생일이면 찾아와 추억담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 3년을 근무하던 어느 날 용인대학교 교수 초빙 공고가 떴다.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통과한 뒤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인덕공고 시절 짬짬이 써둔 논문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원래 대학이 목표였기에 이직의 기회가 주어져 기뻤다.

그런데 인덕공고가 문제였다. 인덕공고 교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축하할 일이지만 이제 겨우 질서가 잡히고 아이들도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어찌할 거냐고 했다. 그동안 코치와 트레이너로 훈련을 돕던 신뢰할 만한 한국체대 후배가 있어 그를 체육 교사로 추천했다. 학교에서는 다행히도 그를 채용했고 나는 용인대학교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인덕공고에 근무하는 동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을 지도하며 교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아직 삶의 방향이 정해지기 이전인 청소년기에 스승이 훌륭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훌륭한 교육인지는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저작권자 © 뉴스후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