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아내가 미국으로 건너간 후 처음으로 귀국했을 때 나는 후배가 마련해 준 투룸 연립에 살고 있었다. 살림이랄 것도 없는 단출한 차림으로 미국으로 들어갈 때까지 며칠을 함께 지냈는데 그때 아내는 아예 귀국하겠다고 했다.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그동안 내가 원룸에서 살았다는 걸 아내는 몰랐다. 그냥 방 두칸 자리를 얻어 한 곳엔 짐을 두고 한쪽에서 자면서 생활한다고만 얘기했다.

아내 역시 직장이 있는 데다 미국에서 아이들과 먹고사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동안 귀국하지 못했었다.

늘 내가 갔기 때문에 내가 사는 모습은 더욱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이 한국에 오는 비행 경비보다 혼자 가는 것이 돈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후배가 얻어 준 투룸에서 살 때 아내가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모습만 보고도 마음이 아팠나 보다.

그동안 아이들은 자라서 당시 딸은 메리워싱턴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아들은 조지아텍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1학년 때에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모두 대학도 갔고 다 컸으니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

미국은 여자와 아이들에게 매우 유리한 나라다. 한 번 길들면 그 편안함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내가 들어오겠다니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왜 들어오려고 해?” 그때만 해도 빚에 쪼들렸기 때문에 가능하면 퇴직해서 빚을 청산하고 나도 미국으로 건너가 아내와 함께 살려고 했다. 태권도장을 차리든 세일을 하든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의중도 모르고 아내는 정색하며 자기가 들어오는 것이 싫냐며 물었다.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러기 아빠들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안들어 오려고 하는데 당신은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아내가 한마디 했다.

“나는 민지 아빠의 나무 그늘이 필요해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늘은커녕 땡볕에 내몰아 살게 한 내가 아닌가. 아내는 이미 한그루 멋진 나무였는데도 나는 얇은 가지였음에도 한 자락이라도 슬쩍 기대고 싶은 그늘이 필요했나 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교육자의 길을 가면서 끝까지 명예를 지키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아내는 얼마 후 귀국했다. 그게 15년 전이다.

귀국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을 정리하고 들어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가재도구나 생활용품을 중고로 팔며 무빙 세일에 나섰다. 이불과 주방 도구 몇 점만 남기고 모두 파는 알뜰하고도 억척스러운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약 4억 원을 들고 돌아왔다.

(사진=뉴스후플러스)
(사진=뉴스후플러스)

약 12년 만의 기러기 생활이 그렇게 청산되었고 아파트도 사게되었다. 아내는 귀국 후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봐왔기에 당시 이곳 아이들의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천대 아동심리학과에서 심리상담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양대학교와 가천대학교에서 강의하며 환경보호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중이다. 현재 ‘미래환경지킴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힘이 닿는 대로 외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혼하자고 하지 않고 여태껏 내 곁에 있어 주는 아내를 둔 건 최대의 행운이다.

아내가 귀국한 후 나무 그늘이 필요하다는 아내에게 최대한 그늘이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내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고생을 해서 생긴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그런 아내와 함께하기 어려울 만큼 나는 늘 학교 일로 바빴다. 학교일뿐만 아니라 사회 직책도 여러 가지 맡아 나날이 바빴다.

봄이 다 갈 무렵 어느 날, 평소보다 좀 일찍 퇴근했는데 아내는 물에 빤 허여멀건한 묵은 김치만을 놓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보통 적어도 2~3만 원가량의 식사를 하는데 그에 비해 아내의 밥상은 너무도 초라했다. 류머티즘으로 맵고 짠 음식을 꺼리던 때라 김치를 물에 빨아 먹었겠지만, 그 초라한 밥상이 그간 내가 아내에게 제공했던 삶 같아서 미안하다는 생각에 목이멨다. 그 후 약속이 없는 날이면 가능한 한 함께 식사하도록 노력하고, 자주는 못 하지만 가끔 아내 생일에 깜짝 파티도 준비한다.

귀국 다음 해인 2008년 음력 5월 28일, 아내의 생일이었다. 나는 ‘올림픽파크텔 서울홀’에 예약을 해두었다. 미리 미국에 있는 아이들이 그날에 맞춰 귀국하도록 했고, 장인 장모님과 처가 쪽 친척들, 아내의 친구들까지 70여 명을 초대했다. 물론 아내 모르게 진행한 일이었다. 현수막을 준비하고 동영상도 만들고 마치 칠순이나 팔순 잔치처럼 만반의 준비를 했다. 며칠 후면 아내가 놀랄 깜짝 생일파티가 성대하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내가 류머티즘으로 심한 통증에 시달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누워있어야 할 정도는 아니어서 어렵더라도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당일 벌써부터 축하객들은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병원에 있는 아내를 찾아갔다. 총장님이 보직교수들 부부 동반으로 모이라는데 나만 혼자 가게 되었다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자꾸 아쉬움을 내비쳤다. 아내는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는 사람이었다. 진정제를 맞은 덕분인지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했다. 사전에 집에서 아내의 옷과 구두 등을 챙겨 차 안에 두었고, 평소 아내가 다니던 미용실에 예약까지 해두었다. 내가 자꾸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자 아내는 어떻게 하느냐며 난색을 보였다.

“몸져누운 것은 아니니까 정 그렇다면 갈 수는 있는데, 옷도 없고 몰골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해요.” 됐다 싶어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야 당신이 가주면 고맙지. 갈 수 있겠어? 그럼 늦기 전에 준비해보자. 옷은 혹시 몰라서 내가 미리 챙겨왔어.” “아유, 내가 못 간다고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아내는 마지못해 서둘렀다. 모든 게 각본대로 돌아갔다. 더 나은 옷도 있는데 하필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가져왔다며 투덜댔지만 어쨌든 꽃단장은 끝났다.

내 제안으로 아들이 제 엄마에게 전할 편지를 준비한 상태였다. 쑥스럽다며 망설이는 걸 용기를 내보라고 설득했다. 아내는 미국에서 아이들이 와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파크텔 계단을 오르며 나는 연신 연기를 했다. 전화기에 대고 “네, 총장님, 거의 다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도착하겠습니다.” 물론 식장 안에 있는 사회자에게 신호를 보내느라 총장과 통화하는 척 한 말이다. 아내는 감쪽같이 속았다. 자기로 인해 늦었다고 내심 미안해 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부러 주춤거리고 아내를 먼저 올려 보냈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계단을 올라 식장에 도착한 아내는 불이 캄캄하게 꺼져있다며 모임 장소가 여기가 맞느냐 물었다. 축하객은 일제히 숨죽여 우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불이 꺼져있어? 그럼 켜면 되지.” 헛기침하는 순간 식장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아이들이 등장하고 박수와 노래와 꽃 리본이 쏟아지면서 식장은 갑자기 파티장이 되었다. 아내는 순간 멈칫하며 어리둥절해했다.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자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감쌌다. 눈에는 눈물이 촉촉했다. “속여서 미안해. 당신을 위해서 꼭 해주고 싶었어.”

MBC의 한광섭 아나운서 국장에게 사회를 부탁한 상태였다. 사회 멘트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내가 만든 영상이 스크린에 가득했다. 다음은 딸아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아들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타국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기가 어디 만만했겠는가. 그간 나모르게 모자지간에 쌓인 애정과 해프닝이 많았을 터이다.

아들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사춘기 시절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러더니 편지를 읽어내려가다 울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그렁그렁한 아내를 그만 어깨가 들썩이도록 흐느끼게 했다. 그 바람에 식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식장은 일순간 아름답고도 숙연한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내는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핀잔을 하면서도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며 그때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소소한 나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삶이란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이어서 그저 매 순간이 소중할 뿐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아이들도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잘 적응해 나갔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렀다. 아내의 생일이 또 돌아왔다. 음력 5월 28일이니까 날씨는 이미 여름으로 접어든 상태다.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런데도 한국체대 학생들은 계절수업을 했다. 수상스키 수업을 위해 청평으로 야외 훈련을 나갔다. 며칠 전부터 나는 아내를 위해 두 번째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이 잠시 귀국해 있었는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으니 시치미 뚝 떼라고 일렀다. 일찍 아들은 볼일 보러 나가고 나도 청평으로 야외 수업 나가야 한다며 집을 나섰다. 아내는 떡 벌어지게 잔치를 해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하고 섭섭했을 것이다. 누구도 생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종일 수상스키 수업을 하고 학생들에게 서프라이즈 계획을 밝혔다. 학생들은 재미있겠다며 저희들이 파티장을 만들어보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 시간 나는 시내로 나와 작은 초 300개를 샀다. 전날 백화점에 가서 목걸이도 하나 준비한 상태다. 학생들은 젊은 감각으로 풍선도 매달고 저희들이 직접 현수막도 급조해 호숫가에 와인 파티장을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 아들에게는 수상스키를 타고 싶은데 오늘 마침 아빠가 청평에서 실기 수업을 하니 수업 끝날 때쯤인 5시까지 데려다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하라고 일러두었다. 아내가 눈치챌 수 없도록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내의 가장 가까운 친구 부부 두 쌍을 문자로 초청했다. 친구들은 기꺼이 와주겠다며 시간에 맞춰 도착한 상태다. 친구 부부에게 훈련장 강당의 뒤편에 잠시 숨어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청평호로 왔다. 어느새 비는 멈춰 있었고, 아내는 호숫가에 있는 파티장으로 오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초가 호수에 비쳐 파티장은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았다. 아들과 미리 신호를 주고받아 파티장을 알린 상태였다. 아내가 도착했다. 학생들이 아우성치며 박수를 보내는 동안 친구들이 등장해 꽃다발을 전달했다. 내가 목걸이를 전하고 학생들의 아우성 속에 두 번째 깜짝파티도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아내는 몹시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흐뭇했다. 제자들과 아내 친구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하며 비 내린 호숫가의 낭만을 밤 이슥토록 즐겼다. 그때도 아내는 깜빡 속았다.

그동안 아내는 공부를 마치고 이곳저곳으로 강의를 다녔다. 사회 활동도 점차 늘려나갔다. 류머티즘으로 여전히 건강이 온전하진 않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생일파티의 감동을 잊을 때쯤 세 번째 파티를 준비했다. 2023년 음력 5월 28일이 되었다. 이미 써먹은 모임은 들키기 쉬우므로 이번엔 특별히 인연이 있는 부부들을 깜짝 이벤트로 활용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그동안 만남이 뜸했던 터라 다 같이 부부 동반으로 모이기로 했다고 아내를 또 속였다.

축하객은 그동안 꾸준히 만남을 유지해온 2쌍의 부부와 아내의 초, 중, 고 친구들이었다. 밥을 살 테니 올림픽파크텔로 오라고 문자로 초청을 했다. 코로나도 풀렸으니 한 번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 하며 사실은 아내의 생일에 깜짝파티를 준비하는 것이니 아내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제안하자 모두가 반갑게 동의했다. 

동영상을 또 준비했다. 대부분의 초청된 사람들은 현장에 오기 전에 생일 이벤트라는 것을 알았지만 모두 비밀을 지키며 동참해 주었다. 아내를 위해 성대하게 깜짝파티를 여는 남편도 있다며 친구의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향해 원성을 퍼부었다.

2쌍의 부부에게는 아내의 생일이라고 하지 말고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했으니 모두의 결혼기념일을 뒤늦게 챙기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마침 우리 3쌍의 부부는 결혼 일자가 1월 13일로 모두 결혼기념일이 같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어느 한 부인이 깜빡하고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미리 건네는 바람에 사전에 발각이 날 뻔했지만 내 임기응변으로 무마되었다.

한참 전에 아내에게 부부 동반 무료 커피 쿠폰이 많이 생겼는데, 아내 친구들에게 보내주겠다며 전화번호를 미리 달라고 했다. 아내는 뭐 그렇게까지 하냐며 약간 부담스러워 했지만, 문자로 쿠폰을 전송하는 것이니 별 부담이 없겠다 싶었는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내의 여러 친구들에게 간곡한 문자를 보냈다. 아내를 위해 깜짝 파티를 하기 위해 모시는 것이니 오는 것을 꼭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모인 축하객이 60명이 되었다. 친구들은 이런저런 선물을 가지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만남에 목이 말라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사 자리에서 “나무 그늘이 필요하다며 돌아와 준 아내가 고마웠지만, 총장 하느라 바빠 제대로 챙기지 못해 이런 식으로라도 갚는 중”이라며 앞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했다. 아내는 앞으로 나가더니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인데, 어쩌면 이렇게 번번이 속을수가 있을까요. 저이가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고 하는데 나를 번번이 속여먹는 남편이랑 잘살기는 힘들 것 같아요.”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식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세 번째 깜짝 이벤트도 그렇게 성공했다.

물론 몇 번의 이벤트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다 표할 수는 없다. 다만 일부라도 빚을 갚고 싶었을 뿐이다. 앞으로 아내와 자식들이 바라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게 내 임무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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