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문이 열렸다. 방에 틀어박혀 3일 밤낮을 울던 아내가 밥상을 들고 나왔다. “어차피 없는 데서 시작했으니까 다시 시작해봐요.” 뚝배기에서 청국장이 푹푹 끓고 있었다. “다시는 저 여자를 울리지 않으리라.” 주먹에서 굵은 심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결혼 후 처음 우리 힘으로 마련한 집, 아이들 웃음소리가 마당에서 콩알처럼 튀었다.

성근 잔디 사이로 강아지풀이 고개를 내밀고, 산에서 캐다 심은 야생화 위로 저녁 해가 붉게 기울던 집.

“얘들아, 이제 그만 내려와” 은행나무에 얹힌 작은 오두막을 향해 아내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서재까지 들려왔다.

신혼 때 양가 부모님이 마련해 준 아파트를 팔고 전셋집을 전전하다 6년 만에 겨우 마련한 집이었다.

상계동에서 용인대까지 길에서 수 시간을 허비해야 했기에 대학 근처로 옮기기 위해 융자까지 받으면서 마련한 집이다. 부모님이 마련해 준 신혼집이 바탕이 되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자금을 늘려 마련한 집이기에 더욱 애착이 갔었다.

주말이면 나무를 사다가 직접 평상을 만들고 주차장 옆에 방을 만들어 집이 지방이라서 다니기 힘든 제자들이 자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내는 꽃밭을 가꾸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것을 손수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뙤약볕에 검게 타는 줄도 모르고 종일 돌보던 정원, 나와 아내의 숨결이 고스란히 깃든 집, 아이들은 은행나무 위 오두막에서 해가 기울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친구들을 데려와 숙제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그 오두막은 민지와 종화에게 톰 소여의 오두막이었다. 유독 지렁이 잡기를 좋아하던 종화는 잡은 지렁이를 기른다고 마당에 작은 웅덩이를 파서 그곳에 모아놓곤 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삶의 골격이 제대로 틀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장춘몽이었다.

1995년 9월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왔다. 유니폼 사업을 하는데 겨울옷이라 10월이면 다 팔릴 텐데 대신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담보가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돈을 직접 꾸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집으로 담보를 서달라는 것이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인감증명서와 도장을 내주었다.

당시 제자들이나 동료가 가끔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돈이 없으면 신용대출을 받아 빌려주어도 어김없이 갚았기에 그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해병대표선수단 동지이기도 하고 국가대표선수도 지낸 후배이기에 당연히 도와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던 때라 의논하고 말고도 없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은행에서 최고장이 날아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가 내 허락도 없이 제2금융권에서 집을 담보로 가능한 최대한의 액수인 7천만 원 정도를 대출받았다는 것과 나 외에도 피해자가 너댓 명 더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비용 대부분을 도박과 유흥비로 썼다는것을. 집값의 절반 이상을 대출받은 셈이다. 융자가 없었다면 그 이상의 돈을 빼갔을 것이다. 남의 집으로, 그것도 허락도 없이. 처음부터 갚을 생각 없이 벌인 일인지도 모른다.

담보를 풀기 위해 아버지께 사정하고 5천만 원을 빌렸다. 차마 사연을 말할 수 없어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그때만 해도 집을 지킬 수 있으리란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우선 돈을 갚으려면 당사자를 만나야겠기에 겨우 찾아내어 그를 구슬렸다. 앉아 주고 서서 받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는 5천만 원을 자신에게 주면 저당을 풀어 해결한 뒤 1억 2천을 바로 갚겠다고 했다. 30분 만에 다시 5천만 원마저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잠적했다. 직접 데리고 가서 해결해야 했음에도 그를 또 믿었다.

사람이니까. 사람은 그래선 안 되니까. 나중엔 결국 찾아내어 구속시켰지만 이미 집은 날아간 뒤였다. 고작 4년 반 만에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사라졌다. 얼마 후 검찰청에 고소인 조서를 위해 들어갔는데 우연히도 화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반드시 갚을 테니 봐달라고 했다. 평소 성격이라면 뺨이라도 한 대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포승줄에 묶인 그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땐 갚을 것이라는 믿음도 사실 없었다. 그냥 털어버리기로 하고 고소를 취하했다. 그 후 중국으로 달아났다는 소문만 무성히 들렸다.

악연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실감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초대를 받아 요녕성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그를 그곳에서 만났으니 말이다. 그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남에게 신세를 지며 살고 있다고 했다. 모두 식당에서 만나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가 실내로 들어 오지도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래도 형님에게 죄를 지어서 그런 것 같아요”라며 후배가 일러주었다.

그를 들어오라고 하고는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 돈 달라는 소리 안할 테니까 밥은 먹고, 다음에 돈이 생기면 갚아, 그리고 앞으론 잘 살아 자식아.” 그 후에도 국내에서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반가운 척도 하지 않았다.

상실의 아픔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갔다. 그리고 길고 외로운 기러기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번 찔린 상처들은 시간의 맨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가끔 불쑥 떠오르곤 했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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