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페루에서 금광을 개발 중인데 중장비를 보내야 하니 돈이 있으면 3억만 빌려 달라고 했다. 한 달 이자로 6백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신문에도 기사가 실리고 금광 개발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이 세간에 풍문으로 떠돌던 때였다.
원룸에 살던 내게 3억이란 돈은 한 사람을 구원할 정도의 액수로 생각되던 때였다.
당연히 가진 돈이 없기에 그럴 돈이 없다고 했다.
그 많은 돈이 내게 있을 거로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기 칠 마음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과한 이자를 준다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언제나 그런 곳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게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었다. 그런 일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기에 함께 점심을 먹고 막 학교로 들어서는 데 문제가 생기려고 그랬는지 때마침 교내 모 여교수가 계단을 오르다 나를 보자 돈을 놓을 데가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그들이 서로 짜고 접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 여교수는 아버지의 돈을 빌려 썼는데 이자를 갚으려면 높은 이자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정치인과 연루돼 정치자금을 관리하느라 사채놀이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 건으로 인해 그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사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당월 선이자 6백만 원을 그 교수에게 선뜻 건넸다. 어리석게도 이래저래 도울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는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인덕공고 교사 시절 3년 동안이나 어려운 학생에게 합숙비와 수업료를 대신 내줄 수 있었다.
모 여교수는 다음 달부터 이자를 받지 못했다고 통보해왔다. 친구는 잠깐 자금이 막혔으니 내가 융통해서 주면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사기라고 할 수도 없어서 신고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돈을 꾸어주고 못 받는 식이었기 때문에 형사입건 대상도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매월 이자를 대신 갚는데 한 달 6백만 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빌려서 건네준 꼴이니 발을 뺄 수도 없었다. 한 달 월급 4~5백 정도에서 미국에 얼마를 보내고 나면 이자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것이다. 아내에게도 물론 얘기하지 못했다. 원금은 갚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돈을 여기저기서 꾸기 시작했다. 생활은 이미 헝클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부스스한 어느 날이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고향 후배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요즘 어디에 사느냐고 묻길래 원룸에 있다고 했더니 별도로 공부하는 중이냐고 했다.
공부하는 데가 아니라 원룸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남이 볼 때 나는 언제나 유쾌하고 호탕하며 명쾌한 사람이었다. 후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그간의 사정을 덤덤히 털어놓게 되었는데 그는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이천의 갑부집 아들이 말이 돼요? 형님, 그렇게 살면 안 되죠.” 그는 형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며칠 후 그 병원 사무장이 좀 보자고 해서 나가보니 간호사 숙소를 찾고 있는데 좀 봐달라고 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있으니 자취방으로 어디가 적합한지 잘 알지 않느냐며 학교 근처 어딘가로 나를 데리고 갔다.
두세 명이 기거할 집으로 어떠냐며 방 두 개짜리 빌라를 보여주었다. 그만하면 괜찮겠다고 했더니 사실은 원장님이 나를 위해 마련했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내가 살 집이라며 열쇠를 건넸다.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극구 사양했지만 그 후배는 내가 자존심 상할까 봐 별별 변명을 다 대며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든든했던 고향 선배가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게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그렇게 투룸 연립에서 아내가 귀국하기 전까지 사람답게 살았다.
세상에는 그런 귀인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또 그들로부터 선을 배운다. 나는 평생 후배의 배려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원룸을 전전하며 산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알아서도 안되었다. 아내조차도 내가 투룸에 살 때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모두 어리석어 혼자 저지른 일이니,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엔 강철같은 강인함도 있지만, 무지렁이같이 여린 구석도 있다. 그 모든 역경은 어리석음보다는 정에 약하거나 마음이 여린 탓에 생긴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잘 믿는다. 세상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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