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7월 4일 오전 10시, 허름한 뉴코아 제과점에 맞선이 주선되어 있었다. 드디어 감독이 A급 여자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감독은 나도 그에 어울리기 때문에 그녀를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볍게 나간 자리에 여자의 부모님과 동생까지 네 명이 나와 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무 준비 없이 장난삼아 나간 자리였기 때문이다.
분위기도 당황스러운데 실내는 열기로 후끈했다. 종업원은 손님이 없어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고 했다.
사장을 직접 불러 ‘우리는 손님이 아니냐’고 당차게 항의했다.
혼자인 어색함과 위축감을 피하려고 일부러 과장했다. 사장은 무안한 듯 돌아가 에어컨을 켰고 우리는 덕분에 열기를 식혔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밖에는 장맛비가 지루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손아랫사람한테 존대하면 혀가 꼬이니까 반말로 하겠다며 기선을 제압했다. 촌스럽게도 남자라는 권위 의식이 있을 때였고 해병대 대표선수라는 긍지가 목을 빳빳하게 하던 때였다.
근처 경양식 집으로 옮겨 당시 최고급이던 돈가스를 시켰다. 김미라는 다소곳이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이가 몇이냐 뭐 하느냐 등등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얼마간의 탐색이 끝나자 나와 결혼하려면 다음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당치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첫째: 하늘 천(天) 자보다 조금 높은 것이 부(夫)자이니 지아비가 하늘보다 높다.
둘째: 차남이지만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
셋째: 부모님 중 어느 한 분이라도 반대하면 이 만남은 없었던 걸로 한다.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말들을 시시껄렁 늘어놓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세가지 모두 ‘당연히 맞는 말’이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단번에 딱지를 맞았을 것이다.
그녀는 거드름을 피우는 내게서 오히려 단순함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만난지 4시간 만에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했다. 장난삼아 조건을 제시했지만 반은 진심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눈이 티 없이 맑았다는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렸는데 창가에 맺히는 빗방울처럼 촉촉하고도 맑은 눈동자가 아주 예뻐 보였다. 눈이 맑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도 떠올랐다.
사실 맘에 들지 않았더라면 네다섯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맞선 후 두 분의 평이 판이하였다고 한다. “성질이 보통이 아니더라. 절대로 그 남자와 혼인하지 말아라.” “패기가 있더라. 장래성이 있어 보인다. 뭐든 할 테니 결혼해라. 남자는 그래야 한다.”
아무튼 맞선을 본 후, 어머니가 상경하신다고 했으니 그때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합숙을 하고 있는 해군본부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김미라였다. 감독이 가르쳐줬다며 그날이 내 생일이라고 찾아가 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고, 그동안 무심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군에 있을 때 여자가 면회 오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군인들에겐 큰 이슈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엿듣던 후배들은 공연히 신이 나서 자신들도 따라가도 되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후배들을 면회실로 데리고 나와 그녀가 가져온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상경해서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김미라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도 그날따라 그녀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께 퉁명스럽게 “싫으면 싫다고 해요.”라고 했더니 “결혼이 무슨 장난이냐”며 “야. 참해 보인다.”라고 하셨다.
며칠 후 아버지께 인사시키기 위해 이천으로 내려갔다.
김미라 보고 잠시 밖에 있으라고 하고 집안 동정을 살폈다. 불쑥 들어가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쁜 아버지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집에 들어서서 인사를 마치자마자 아버지는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안그래도 내 결혼을 서둘렀던 아버지는 다급하기라도 했는지 다짜고짜 선 자리가 하나 들어왔는데 국회의원 딸로 이화여대를 나왔다며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때 김미라에 대해 말씀드리며 “그럼 저 아가씨를 가라고 할까요?” 했더니 화를 내며 “니가 좋아하니까 같이 온 것 아니냐?”라며 들어와 보라고 했다. 수줍게 들어선 김미라를 보고 아버지는 단박에 마음에 들어 했다. 이런저런 질문 끝에 더는 볼 거 없다며 집에 가서 부모님과 날짜 잡으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속전속결 9월 30일에 약혼하고 1985년 1월 13일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1월 15일이 제대 날이니 엄밀히 따지면 현역 때 결혼을 한 셈이다.
믿는 어른들의 소개였고,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지만 나는 인륜지대사를 그렇게 겁 없이 결정했다. 하지만 그날의 결정이 가장 잘한 결정이라는 걸 살면서 알게 되었다. 결혼식은 서울에서 하게 됐다.
서울 강남역 근처에 있는 목화예식장이었다. 예식장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5층 특실이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성공했기 때문에 식장이 꽉 차고도 남을 정도로 하객이 많았다. 장인어른도 하객이 많아 그야말로 식장은 대만원이었다.
예정된 오후 3시, 주례가 나타나질 않았다. 지금이야 주례 없이 식을 올리는 게 대세지만 당시로서는 주례 없는 결혼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주례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있던 시절이었다. 주말이고 마지막 결혼식 시간이라 주례 대행사들도 모두 퇴근을 하고 난 후였다. 어머니는 행여 결혼식이 망가질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다.
모교의 박철빈 학장이 주례를 서기로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넘도록 오질 않았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학장이 학교에 있을 리 없는데도 다급하니까 다이얼을 돌렸다. 비서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반갑고도 이상해서 왜 전화를 받느냐, 혹시 학장님이 학교에 계시냐 이것저것 다급하게 물으니 학장님이 학교에 있다고 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직원에게 주례 서기로 했는데 여태까지 학교에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속사포처럼 퍼붓자 긴급 감사라서 감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당시 국가는 한국체대 학생선수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1주일 한 끼는 닭 한 마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식욕이 왕성한 청춘들도 닭 한 마리를 다 먹는 건 어려웠다. 번번이 닭이 많이 남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 마리로 줄이는 과정에서 반 마리 값을 다른 용도로 쓴 것이다. 한국체대 역사에서 우리는 그것을 ‘통닭 사건’이라고 한다. 그것이 감사 대상이 돼 학교로 찾아온 것이니 학장이 얼마나 긴장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전에 결혼식장으로라도 연락을 취했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가 떠안게 되었다. 기다리다 못해 부랴부랴 축하해주러 온 교수님들을 찾았다. 7명의 교수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장이 문제였다. 모두 일반 신발에 점퍼 차림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이상철 교수가 콤비에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주례 서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며 마다하는 그를 한사코 주례석으로 몰며 어떻게든 해보라고 했다. 이미 약속시간으로부터 40분이나 지난 후였다.
교수님이 흰장갑을 끼고 드디어 주례석에 섰다. “에, 안군과 저는 많은 토론을 하며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암에 걸린 미국의 운동선수가 암 퇴치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달리기를 하다가 죽었다고 이야기하면서 10만 불이 목표였는데 30만 불이 걷혔지만, 결국 그는 결승점을 통과한 후 죽었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결혼식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두운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아버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남의 결혼식에 왔으면 좋은 이야기를 해야지 암이니, 죽음이니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며 화를 냈다. 예식이 오전이었다면 더 엉망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마지막 타임인 3시여서 늦게까지 식을 올릴 수 있었다. 주례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기러기 한 백년으로 늘어놓다가 끝을 맺었다. 아무리 주례 경험이 없었다 해도 그건 좀 심했다.
천신만고 끝에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결혼식이 끝났다. 아버지는 결혼식을 망쳤다며 학장과 교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기념사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고 호통을 쳤다.
이천 굴지의 사업가로서 수많은 축하객을 맞이해 진행하는 결혼식인데 이래저래 엉망이었으니 일면 이해도 됐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길 해프닝이지만 그때는 정말 난감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난리 중에도 아내 김미라는 침착하고 의연했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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