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돈을 꾸며 1년을 버티던 어느 날 오래 관계를 유지해오던 한 지인이 내 사정을 알고는 깜짝 놀라며 방법을 하나 제시했다.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 교수, 그러다 큰일 난다. 영영 헤어나지 못하는 수가 있어.

이제부터 이자는 못 갚고 원금만 갚을 테니 그렇게 해달라고 통보해. 원금조차도 못 받을까 봐 그렇게 하자고 할걸?!”

약속인데 설마 그렇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마음 단단히 먹고 통보하라고 나를 다그쳤다.

그의 말대로 며칠 이자가 지체되자 그 교수는 원금만 갚으라고 했다. 대신 불안하다며 담보를 요청했다.

이자에서 벗어나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어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으로 근저당 설정을 해주기로 했다. 마침, 내 명의로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머니께는 알리지 않았다. 원금 갚을 길은 요원했지만 일단 숨이 돌려졌다.

어느 날 어머니가 호통을 치며 나를 불러 내렸다. 집이 담보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내가 오래 미국에 가 있으니 필경 여자 문제가 생겨 재산을 날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원룸에 사는 걸 어머니는 몰랐다. 그저 아이들 미국에서 공부시키느라 고생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에 빠졌길래 어미가 사는 집까지 저당을 잡히냐며 역정을 냈다. 하는 수 없이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화를 내던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눈이 한 치는 들어간 듯했다. 너무 불효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교수를 만나 사정을 하고 근저당을 풀어주면 팔아서 원금을 바로 갚겠다고 했다. 그는 이제까지의 사정을 잘 아는지라 그러겠다고 했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아내가 물었다. “당신 여자 생겼어요?” 수상하다고 했다. 내가 완전히 딴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얘기하라고 다그쳤다. 여자가 있으면 이혼해줄 테니 실토하라고까지 했다. 기가 막혔다. 나 하나도 제대로 건사할 처지가 못 되는데 여자를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정신이 나간 건 사실이었다. 화통하고 긍정적이고 무던한 나였지만 그만큼 지쳐있었다. 급기야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내는 믿을 수 없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이가 없다고 했다. 속는 건 한 번으로 끝내야지. 어떻게 매번 그러냐며 눈물을 쏟았다. 몇 년 전에는 삼 일 밤낮을 울더니 이번엔 하루만 울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아내가 방법을 하나 제시했다. 어머니와 상의해서 집을 처분해 빚을 청산하라고 했다. 속상하긴 하겠지만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믿는 분이니 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노후는 우리가 보살펴드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고마웠다.

귀국 후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큰집이 필요 없으니 작은 빌라로 옮기고 집을 팔자고 제안했다. 용돈은 매달 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눈물을 훔치며 빚은 잠도 안 자고 새끼를 치니 그렇게 해서라도 갚으라고 했다.

부모님의 땅이긴 하지만 내가 나서서 지어드린 집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타개할 때까지 오래 살았는데 어리석은 나로 인해 그 추억의 장소를 잃게 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도 집은 바로 팔렸고, 비로소 써보지도 못한 돈 때문에 생긴 빚을 청산하게 되었다. 빚을 갚고 난 돈으로 어머니가 기거할 빌라를 사려 하니 돈이 모자랐다. 어머니 비자금 천만 원을 보태서 결국 4천만 원을 주고 어머니가 살던 집 근처에 있는 작은영월빌라를 샀고 어머니는 그 빌라로 이사를 했다.

결국 그 빌라에 사시다 2012년에 타개했는데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한때 이천의 부잣집 마님이었던 어머니가 두 아들 때문에 말년에 마음고생을 하셨을 걸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내가 총장이 되고 집도 마련하고 지금처럼 걱정 없이 살게 된 걸 알면 하늘에서나마 기뻐하시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해서 집 두 채를 날렸다. 하지만 당시에는 빚을 청산했다는 것만으로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사람 됨됨이와 사는 방법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던 시기였다. ‘고통으로 인한 적의를 사회로 쏟아내면 패자가 되지만 안으로 끌어안으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통감했다. 역경을 통해 어려운 사람의 처지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고, 재물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청난 수업료를 내고 겸손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사진=뉴스후플러스)
이천고 태권도부에 기부금전달(사진=뉴스후플러스)

나는 사업을 하면 무엇이든 잘된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새어나가는 유형이다. 특별히 사치하거나 영웅주의에 도취해 누군가를 힘에 부치게 돕는 것도 아닌데 돈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래서 그 이후론 돈이 생기면 많든 적든 가능한 한 기부한다.

1996년부터 모교 이천고 태권도부에 하는 기부도 그와 관련이 있다. 오래 기부하다 보니 이천고 태권도부 경우엔 매년 행사를 열면서까지 기부한다. 실제로 부자는 아니지만, 마음은 넉넉하다.

그래도 복은 타고났는지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내 아내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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