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이 주선되기 직전, 제대를 앞둔 내게 경기대학교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대학에 태권도 팀을 창단했는데 코치로 채용할 테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다. 7월 말이었다.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안용규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

면접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다만 우수한 선수로 입학생을 스카우트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 조건을 제시한 때가 10월이었다.

보통 신입생 스카우트는 7~8월에 이루어진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수시모집인 셈이다.

중고 시절부터 대학에서 군생활까지 꾸준히 태권도를 했고, 그 분야에서만큼은 정보도 많았기에 선수 스카우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고 1명, 동대문상고 1명, 송곡고 1명, 풍생고 4명을 스카우트해서 승인까지 받았다.  다음 신학기에 출근하면 되었다. 생애 첫 직장, 열심히 하면 대학교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목표는 대학에서 선수를 교육하는 일이었다. 전임 코치가 된다면 2년 후 재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교수와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에 나는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직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결혼도 서두른 것이다.

그런데 2월이 되어도 학교로부터 소식이 오질 않았다. 몇 번 전화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거듭했다. 2월에 실시하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려면 합숙훈련도 해야 하고 코치가 있어야 하는 데 연락이 없어 학교로 찾아가니 국가대표 선발전 신청 서류의 코치 자리에 내 이름이 없었다.

“무보수로 지도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자네가 이해하게. 사립대학이 아닌가. ”내게 이력서를 넣으라고 청했던 교수가 던진 말이었다. 너무도 황당했다. 이건 뭔가 싶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항의를 했겠지만, 당시는 억울하더라도 그런가 보다 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든든한 백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안가 집안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안소니 퀸과 안드로포프 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태권도 (그림=고우영 화백) / 뉴스후플러스
태권도 (그림=고우영 화백) / 뉴스후플러스

생애 첫 취업에 실패하고 무직자가 되었다. 배신감도 컸지만 결혼 직후였으니 더욱 낭패감이컸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폐백 때 절값으로 받은 돈이 있었다. 잠은 호텔에서 자고 대신 음식은 허름한 것으로 먹었다. 2월에 경기대학교로 출근한다 해도 당장 수입이 없으니 여행 비용을 최대한 아껴 생활비로 써야 했다.

결혼했으니 집들이도 해야 하고 돈 쓸 일이 많았다. 하지만 2월에 취직은 불발이 되었다. 가장이 되었으니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어떻게 취업해야 할지 당시로선 아주 난감했다. 갓 제대한 애송이 사회인이었고, 체육인이 일할 만한 번듯한 직장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패배감에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잠깐이긴 하지만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생활비가 걱정돼 돈이 있느냐고 물으면 늘 있다고 대답하던 아내였다. 그런데 콩나물 살 돈이 없다고 했다. 내가 무직이니 어디서 돈이 생기겠는가. 그래도 나는 여전히 돈이 있겠거니 했다. 그만큼 세상 물정을 몰랐다.

아내를 데리고 이천으로 향했다. 대학 공부시키고 신혼집까지 마련해줬으니 더는 손 벌리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내심으로는 아버지의 경제력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트럭이라도 몰아야 옳지않은가. 아무튼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다. 미봉책이긴 하지만 그사이 일자리를 알아볼 참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경제권이 형에게 넘어가 용돈을 타서 쓰는 중이니 형에게 얘기해보라고 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장남에게 모든 사업을 물려주고 아버지는 뒤로 나앉은 셈이다. 형은 장남으로, 사업가로 입지를 살리고 싶어 했지만, 타향이나 마찬가지인 이천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인 ‘태규’보다는 ‘용규 형’이나 ‘안신주유소 아들’로 통했던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해있었다. 어릴 때부터 활달한 성격으로 이천에 친구나 선후배가 많았던 나보다 그런 면에서는 입지가 약했다. 나름 능력 있고 잘나가는 사람인데 이천에서의 입지는 좁았으니 일면 이해도 됐다.

시간이 필요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당장 어찌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어서 취직할때까지 월 15만 원만 보태달라고 부탁했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사글세로 시작해서 자립해야 한다고 했지만, 시작은 좀 낫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장인어른의 주장에 의해 양가가 반씩 부담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 덕에 17평 반포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한신공영 자재부 부장이었던 장인의 도움이 컸다. 장모님이 한신공영 일가의 친척이어서 감독도 장인어른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지금으로 말하자면 금수저로 신혼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ChatGPT(DALL·E) 생성 이미지 (OpenAI)(사진=뉴스후플러스)

아파트 관리비가 11만 원이니 그 정도만 도와주면 나머지 생활비는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다. 형은 그 정도로 되겠냐며 승낙을 했다. 그러나 집에 가겠다고 인사를 해도 안방에서 잠을 자고있던 형은 건성으로 답할 뿐 돈은 주질 않았다. 당장 생활비가 없어서 내려갔음에도 그건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두세 번 더 간청했다. 그러자 누워서 돈을 세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바닥에 던졌다. 어쩌면 놓친 것일 수도 있는데 나의 자격지심에 뿌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닥에 흩뿌려진 지폐들, 속으로부터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충격이었다. 분명 유산의 일부 중 내몫이 있을 텐데 가업을 이어받은 형의 독식, 이 엄청난 분배의 오류, 법으로 치자면 소송감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본디 그 돈은 내 것이 아닌 아버지의 돈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장남이 유산을 독식해도 윤리적인 면에서 비난받을 뿐 법적으로 대항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모는 참기 어려웠다. 무릎을 굽혀 지폐를 하나씩 주우면서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손 벌리지 않으리라. 아내는 눈이 빨개져 있었다. 동부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제7대 한국체육대학교 안용규 총장 약력 (태권도 공인 9단)

▲ 한국체대 체육학과 졸업, 동국대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 이학박사, 고려대 철학박사 ▲ 전 용인대·한국체대 교수 ▲ 전 대한태권도협회 연구위원장ㆍ도장위원장, 국기원 태권도연구소 학술교류위원 ▲ 전 대한체육회 이사 ▲ 전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감독 역임 ▲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상임고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고문, 한국유엔봉사단 부총재

▶ 수상: 대한체육회 체육연구상 (2005), 대한민국 체육훈장 백마장 (2007), 캄보디아 왕실대훈장 (2022), 미국 대통령 최고봉사상 (2022),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2025) 등

▶ 저서: '태권도 탐구논리'외 25권

▶ 연구논문: ‘태권도 역사와 정신 연구’외 2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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