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군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훈련이 ‘천리행군(千里行軍)’이었다. 천리행군은 말 그대로 20일 동안 강원도 산길을 천리, 즉 400km를 행군하는 것이다.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후 약 24년간 검사 생활을 역임한 박찬록 변호사_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군 생활을 소위 ‘빡세게’ 했다는 사람도 천리행군을 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등장하는 사람들이 특수부대 출신이다.

특수부대 출신들은 천리행군에 더 나아가 산에서 나무뿌리를 캐 먹고 뱀을 잡아먹으면서한 달을 버텼다는 무용담을 터뜨린다.

그러나, 특수부대 천리행군과 우리와 같은 속칭 ‘땅개(육군 보병)’의 천리행군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차원이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특수부대의 천리행군은 고상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보병의 천리행군은 짠한 생활형 방식이다.

 보병의 천리행군은 소총은 물론 온갖 살림살이를 군장에 넣는다. 텐트, 모포, 우의, 전투복, 내의,양말, 수건, 빨랫비누, 치약, 칫솔, 실, 바늘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준비해야 한다. 심지어 막내 병사는 고참들의 전투화를 도맡아 닦아야 하였으므로 구둣솔과 구두약까지 챙겨야 한다.

1991년 가을, 내가 상병일 때 드디어 천리행군이 시작되었다. 우리 대대는 주둔지인 강원도 임원에서 군용차로 주문진까지 이동하였다. 주문진에서 천리행군을 시작하는 것이다. 대대장인 중령이 제일 앞장을 서고 500~700명의 병사들이 도로 한쪽 길을 걸어 오대산으로 향하였다. 군인들의 긴 행렬은 그 자체로 장관(壯觀)이자 구경거리였다. 시골 동네 사람들도 무슨 난리가 났나 싶어서 집 밖으로 나와 구경하기도 하였다.

장거리 행군을 하게 되면 누군가가 낙오자가 생기게 된다. 군기가 들지 않은 훈련소에서는 가벼운 차림으로 20~30km 행군을 하여도 낙오자가 생기고, 군기가 바짝 든 우리가 천리행군같이 장기간의 행군을 하더라도 낙오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천리행군은 당일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일 동안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행군 내내 지루함을 없애고 낙오자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열 맨 뒤편에 의무차를 배치하였다.

장기간 행군에 경련이 오거나 쓰러지는 병사도 있었다. 평소 체력이 좋거나 나쁘거나, 체격이 크거나 작거나 관계없이 낙오자가 발생하였다. 낙오자는 응급처치를 받고 의무차를 타고 편하게 다음 코스까지 이동하게 되지만, 한번 낙오를 하게 되면 향후 부대에 복귀하여 ‘고문관’으로 낙인이 찍혔다. 아무리 내무반 생활을 잘하여 고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야외 훈련이나 행군에서 낙오를 하는 경우는 용서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후임병일수록 부대 복귀 후의 불이익을 우려하여 낙오하지 않기 위해 더욱 악을 쓰고 이를 악물었다.

아침부터 행군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또다시 행군하였다. 야영할 장소에 도착하면 저녁이 되었다. 신속하게 중대별로 정해진 지역에 텐트를 치고 제일 먼저 화장실을 파고 둘레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밖에서 사람이 잘 안 보이게 만들었다. 이어서 식사가 공급되었다. 고된 하루의 일정을 마친 후 먹는 저녁 식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두움이 채 가시기 전에 주변에 시냇물이 있으면 빨래를 하기도 하고 물에 들어가 샤워도 하였다. 늦가을 강원도 산골의 맑은 물은 정말로 차가웠다.

행군을 하면서 땀을 많이 흘렸고, 또 언제 시냇물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샤워를 하여야 했다. 텐트 속에서 2~3명의 병사들이 들어가 노곤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Microsoft Copilot을 통해 생성된 AI 이미지(사진=뉴스후플러스)

새벽 6시, 기상나팔이 울리면 일제히 일어나 아침체조를 하고 가벼운 구보를 하였다.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파 죽겠는데 아침에 구보까지 하니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장병들은 아무도 투덜거리지 못하였다. 식사를 한 후 잠을 잤던 텐트를 모두 걷어 다시 군장에 넣고 정처 없이 북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행군 도중 대부분은 차량의 지원을 받아 편하게 식사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산악지대를 이동하여 식사 차량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미리 배급받은 전투 식량으로 식사를 해결하거나, 반합으로 불을 지펴 직접 밥을 짓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 중에는 속옷이나 양말 등 간단한 빨랫감을 빨기도 하였다. 당시는 늦가을이었고 햇볕이 강했으므로 러닝이나 양말을 군장 위에 매달아 오후 내내 행군을 하면 저녁에는 다 말랐다. 외관상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갈아입을 속옷이나 양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행군 중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발목이나 무릎이 아픈 것이었다. 군장 무게가 최소 20kg이 넘었고, 때로는 M60 소총이나 80mm 박격포를 교대로 메고 행군을 하여야 했다. 각 분대마다 M60이 한 정씩 있었으니 우리가 메고 이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대부분이 산길이거나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비포장도로였다. 혹시 큰 도로를 이용하더라도 최대한 자동차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걸어야 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다만 앞사람만 보고 정처 없이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지치고 힘들었다.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올라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오면 흥미가 떨어진다나…. 진부령과 미시령을 한꺼번에 넘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출발할 때 점심때 먹을 전투 식량을 미리 받아 군장에 넣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속초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시령을 넘어야 했고, 우리가 행군을 하던 시절은 늦은 가을로 단풍이 만개하던 때였다. 수많은 관광버스가 미시령 고개를 넘고 있었고, 대규모 군인들이 행군을 하고 있으니 차량들도 조심스레 운행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버스에서 우리들에게 음식물 폭탄 세례를 하였던 것이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단풍놀이를 가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버스 창문으로 음식물을 던져 주었다.

과일이며 과자며 떡이며 음료수며, 우리는 정신없이 음식물을 군장에 담았다. 간부들 수입(?)도 짭짤하였던지 50분을 채 행군하지 않아 다시 휴식을 지시하였고, 우리는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음식물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천리행군을 무사히 마치고 부대로 복귀할 때 부대 주변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물론 행정관청에 의하여 동원된 모습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감격하고 울컥하였다.

그렇게 그 무시무시한 천리행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동료들과 부대끼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하였다. 우리가 천리행군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자 그다음부터 다른 부대도 천리행군이 시작되었고, 부대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군대에 간다면 또 천리행군을 할 것인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가끔씩 군대 관련된 꿈을 꾼다. 나는 군대를 다녀왔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꿈에 등장한 사람들은 나에게 다시 군대를 가야 한다고 강요한다.

미칠 노릇이다. 천리행군도다시 하란다. ‘아, 그만, 그만…’ 가까스로 꿈에서 깨어난다. 현실이어서 다행이다.

▣박찬록 변호사 약력

▲경북 안동 출생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0기 수료 ▲2001년 울산지검 검사로 임용.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검찰청, 법무부와 대검의 기획부서에서 검사로 근무하였고 상주지청장, 부산서부지청장, 부산지검 2차장, 수원지검 1차장 등 역임. 2024년 6월11일 서울고검 공판부장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 ▲現) 법무법인(유한) 해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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