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쇼크·강달러에 이달 낙폭 세계 1위…환율 1470원 후반까지 추락
자본유출·정책 불확실성·내수 부진·산업 편중이 약세 심화
외환당국, 국민연금 참여한 4자 협의체 가동…전략적 환헤지 논의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뉴스후플러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뉴스후플러스

원화 가치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낙폭을 기록하며 '세계 최약체 통화'로 평가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공지능(AI) 고평가 논란과 강달러 흐름이 촉발한 위험회피 심리에 한국 경제 고유의 구조적 약점이 겹치면서 원·달러 환율은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인 1470원대 후반까지 떨어졌고, 시장에서는 1500원 돌파 우려까지 제기된다.

금융시장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국민연금까지 참여시키는 외환 안정 협의체를 긴급 가동하며 대응 강도를 높이고 있다.

◇ AI 충격과 강달러에 원화 낙폭 '세계 1위'…1470원대 후반까지 밀려

지난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475.6원으로 마감하며 지난 4월 9일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원화 가치를 기록했다. 장 초반부터 역외시장에서의 약세가 반영되며 1472원대에서 출발했고, 개장과 동시에 1470원선이 무너졌다.

미국 증시에서 AI 고평가 논란이 다시 불붙으며 위험회피 심리가 강화된 것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AI 관련주의 급락은 글로벌 달러 매수세를 자극했고, 그 충격이 원화에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반영됐다.

그 결과 이달 들어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3.29% 하락하며 같은 기간 약세를 보인 일본 엔화(-2.11%)보다 낙폭이 더 커졌다. 유로와 파운드가 오히려 강세를 보이고 동남아 통화까지 강세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원화만 유독 빠르게 떨어지자 시장에서는 "환율판에서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붙기 시작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에 환율 상승 압력은 일시적 충격을 넘어 구조적 약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실제로 외환당국이 지난 14일 구두개입과 실개입 추정 신호를 보내며 1450원대까지 되돌린 뒤에도 공급 불안과 달러 수요가 동시에 이어지면서 약세 흐름은 다시 강화됐다. 특히 수출기업의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 좀처럼 시장에 나오지 않는 점은 원화 약세를 더 고착시키고 있다.

◇ 자본유출·규제 혼선·내수 취약성·산업 편중…복합 구조가 원화 눌러

전문가들은 이번 원화 급락이 단순한 외부 충격 때문이 아니라, 한국 경제 내부에 쌓여온 구조적 압력이 한꺼번에 표면화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해외투자가 확대되면서 국내에서 달러 유출이 사실상 상시화된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9월까지 금융계정 기준 해외투자에 따른 달러 유출 규모는 809억9000만 달러로, 같은 기간 경상수지 흑자 규모와 거의 일치한다.

한국은행은 "최근 환율은 국내 거주자의 해외투자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외부 충격이 발생할 경우 원화가 다른 통화보다 더 빠르게 약세로 기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

정책 환경의 불확실성도 자본 이탈을 부추기는 요소로 지목된다. 부동산·노동·투자 관련 규제가 수시로 바뀌는 정책 환경은 기업과 투자자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여기에 내수의 취약함이 원화의 체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91.7%로 아시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소비 탄력성도 낮아지고 있다.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처럼 관광·송금 기반이 강한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외부 충격이 바로 내수 약화로 전가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산업 구조 역시 원화 약세를 키우는 요인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AI 산업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글로벌 AI 고평가 논란이나 미·중 갈등 고조 같은 외부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을 갖고 있다. 하나은행 서정훈 연구위원은 “TSMC가 있는 대만을 제외하면 한국이 아시아에서 AI·반도체 쏠림이 가장 심한 국가”라며 구조적 리스크를 지적했다.

◇ 1500원 공포에 정부 '총동원'…국민연금 참여한 4자 협의체 가동

시장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24일 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를 긴급 출범시켰다. 이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달러 수요가 환율 변동성을 키운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협의체는 국민연금이 보다 적극적인 전략적 환헤지에 나서는 방안,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간 외환 스와프 연장·확대 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당국은 "국민연금의 수익성과 외환안정이 조화롭게 달성될 수 있도록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당국의 공조 신호가 나오자 24일 오후 장중 환율은 1477.1원에서 1475원대로 내려왔고, 시장에서는 "정부가 상단을 제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만 국민연금을 환율 안정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국민 노후자산의 수익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와 함께 환율 상승은 금융 시스템에도 부담을 준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은행의 보통주자본(CET1) 비율이 하락하는데, 현재 5대 금융지주 CET1 비율은 12.34~13.83%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1500원대로 진입하면 건전성 지표 악화와 주주환원 전략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한다.

시장의 관심은 '연저점 1484원'이 다시 무너질지, 더 나아가 '심리적 경계선 1500원'을 넘어설지에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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